0.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Fate/stay night가 출시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게임을 재밌게 했다. 그중 일부는 이 게임이 너무 재밌던 나머지 앞으로도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다.
페이트는 문학이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 게임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에 Fate/stay night의 리마스터 버전의 한국어 패치가 공개되었고 세일도 하는 김에 한 번 해보기로 결정했다. 과연 페이트는 문학인지 검증해 보면서 말이다.
1. Fate/stay night(이하 페스나)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인 에미야 시로가 어쩌다가 서번트인 세이버를 뽑아 성배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에미야 시로는 승리를 위해 성배전쟁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는 생략이 많이 된 이야기가 실제로는 내용이 많다. 거기에 페스나는 비중이 동등한 루트가 3개나 되므로 이를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어렵다. 그러므로 일단은 세 루트 모두 공통되는 점부터 리뷰하고 넘어가겠다.
페스나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연출이다. 20년 전 게임이라고 해서 그냥 평범한 비주얼 노벨일 거라 생각하고 게임에 들어갔는데 연출이 정말 놀라웠다. 아니, 과장 좀 보태서 비주얼 노벨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연출이 뛰어나다. 캐릭터들이 비주얼 노벨답지 않게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고 CG는 완벽한 타이밍에 나오며 BGM도 몰입도를 높여준다. 특히 이는 전투씬에서 더 빛나는데 거의 매 전투들이 소년만화의 최종전을 보는 듯한 짜릿함을 보여준다.
비주얼 노벨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택지 시스템도 일품이다. 개인적으로 좋은 비주얼 노벨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선택지 등 능동적인 게임 플레이 메카닉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거 없이 정해진 이야기를 버튼 하나만 누르면서 보는 건 게임이 아니라 소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페스나는 선택지 시스템을 시기적절하게 활용해 마치 내가 에미야 시로가 된 것처럼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는 비주얼 노벨 특유의 버튼 연타의 지루함을 완화시켜 준다.
캐릭터도 페스나가 빛나는 파트다. 기본적인 캐릭터 디자인부터가 좋고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디자인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개성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들도 왜 그 캐릭터가 매력이 없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치 마토 신지나 마토 조켄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둘은 매우 비호감이지만 그 비호감은 게임 내에서 완벽하게 의도된 것이며 이는 스토리를 완성도를 높여주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런 점들이 페스나가 20년 역사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페스나가 무결점의 게임은 아니다. 역시 페스나도 단점들이 있는데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일상 파트의 지루함을 꼽고 싶다. 페스나는 게임 특성상 마스터끼리 싸우는 전투 파트와 일상생활을 즐기는 일상 파트로 나뉘는데 이 일상 파트가 전체적으로 지루하고 졸리다. 타입문도 이를 알아서인지 일상과 전투를 번갈아서 배치해 게임 전체의 지루함은 많이 지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재미있는 전투 사이에 일상 파트가 길게 끼워져 있는 관계로 도리어 일상 파트 자체의 지루함은 더 크게 증폭된다. 이는 Fate와 UBW 루트에서 더 강조되는데 두 루트가 각각 게임의 첫, 그리고 두 번째 스토리라인이라는 걸 감안하면 꽤 아쉽다.
그리고 페스나의 근본에서 오는 한계도 보인다. 페스나는 원래 야겜이라서 장르의 취지에 맞게 야한 장면들을 중간에 넣었었다. 다만 그때도 그 장면들의 반응은 별로 안 좋았던 걸로 보여 이후 버전들에서는 이를 적당히 건전한 장면들로 바꿨다. 근데 그래도 야겜 시절의 흔적들이 남아있고 이것들이 너무 사족처럼 느껴진다. 대표적인 예로 Fate 루트에서 세이버와 시로의 마력패스를 연결하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에서는 야한 장면이었다. 그래서 연결할 때 굳이 세이버와 시로가 옷을 벗으면서 부끄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굳이 이런 장면을 넣어야 했나 싶었다.
2. 페스나 전체에 대한 평가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이제 페스나의 세 가지 루트, 즉 Fate, UBW, 그리고 Heaven's Feel에 대한 개별적인 평가를 시작하겠다. 우선 Fate 루트는 페스나의 상징과도 같은 세이버가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다. 전체적으로 성배전쟁의 기본적인 규칙과 진행 방식을 소개하는 동시에, 세이버, 정확히 말하면 아서 왕 아르토리아 팬드래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Fate 루트의 가장 큰 강점은 페스나, 나아가 Fate 시리즈 전체의 거대한 토대를 다진다는 점이다. 처음 게임을 접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 있는 성배전쟁, 서번트, 령주, 보구 등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며, Fate의 세계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이러한 설명들을 단순한 텍스트 나열이 아닌,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서번트 클래스가 왜 중요한지, 보구와 진명을 감추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령주를 왜 신중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Fate 루트의 또 다른 백미는 시로와 세이버의 애틋한 관계에 있다.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던 두 사람이지만, 과거의 지울 수 없는 실패에서 비롯된 PTSD와 그로 인해 생긴 과도한 자기희생이라는 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이처럼 닮은 모습을 지닌 시로와 세이버는 수많은 대화와 전투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점차 연정을 키워나간다. Fate 루트는 이러한 과정을 다소 애절하면서도 설득력 있게 그려내어 플레이어의 몰입을 이끌어낸다. 특히 마지막 엔딩에서 이 둘의 이야기는 감정적으로 최고조에 달하며, 비극 속 한 줄기 희망이라는 Fate 루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아름답게 마무리한다.
물론 Fate 루트가 완벽한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Fate 루트에도 분명 아쉬운 점들이 존재한다. 가장 큰 단점은 스토리 전개가 다소 늘어진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Fate 루트는 페스나의 첫 번째 루트인 만큼 세계관과 설정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 과정에서 몇몇 부분들은 지나치게 반복적이거나 불필요하게 길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전투 장면이 아닌 일상적인 장면에서는 이러한 늘어짐이 더욱 두드러지며, 몰입감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덧붙여, Fate 루트는 히로인인 세이버가 시로와 가장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시로의 단점이 가장 크게 부각되는 루트이기도 하다. 세이버가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자는 싸우면 안 돼!"와 같은 낡은 사고방식을 고수하며 세이버의 전투를 막으려는 시로의 행동은, 20년 전 게임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고루하게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후반부에 세이버를 구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초중반부의 시로의 고집스럽고 답답한 모습은 플레이어에게 불편함을 야기한다. 시로의 이러한 고집은 마치 벽과 대화하는 듯한 답답함을 선사하며, 스토리 진행에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Fate 루트는 훌륭한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이런 단점들로 인해 완벽한 시나리오로 평가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남는다.
3. Fate 루트 클리어 후에 나오는 다음 루트는 UBW 루트다. UBW 루트는 Fate 루트에서도 조력자로 나오는 토오사카 린이 히로인인 루트다. 다만 UBW 루트는 Fate 루트와 달리 시로와 린의 관계 못지않게 시로와 죽어서 영령이 된 미래의 시로, 아처와의 관계, 그리고 시로의 내면과 성장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UBW 루트의 가장 큰 장점은 시로라는 캐릭터의 입체적인 변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Fate 루트에서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던 시로는 UBW 루트에서는 세이버와 비즈니스 관계인 덕에 답답한 언행을 많이 줄이며 미래의 자신인 아처와 대립하며 자신의 이상을 재확인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로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닌 인물로 성장한다. 특히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위해 타협하지 않는 시로의 모습은 때로는 과격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또한, UBW 루트는 페스나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더욱 다채롭게 활용한다. 아처는 시로의 이상이 과연 옳은 것인지, 혹은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만들고, 이야기의 깊이를 더한다. 쿠즈키 소이치로와 캐스터는 이 루트의 중간보스로서 각각 세이버를 패는 무력과 서번트 도적질을 통해 스토리 중반부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랜서도 중후반부 조력자로서 무력과 매력을 뽐내며 길가메쉬는 폭군으로서의 카리스마와 함께 루트의 최종 보스다운 훌륭한 샌드백이 되어 준다. 마지막으로 토오사카 린은 단순한 히로인 역할을 넘어, 시로의 조력자이자 라이벌로서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캐릭터들은 전투로 인해 더욱 빛나는데 특히 아처 vs 시로, 길가메쉬 vs 시로 간 전투는 페스나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 화려하고 역동적이다. 이러한 전투 장면들은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 캐릭터의 신념과 의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이야기의 몰입도를 한층 더 끌어올린다.
물론 UBW 루트 역시 아쉬운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이 루트 역시 일상 파트의 지루함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물론 아처가 좀 더 능동적으로 행동하며 주인공 파티 간 케미를 더해주긴 하지만 그걸로 일상 파트의 지루함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UBW 루트는 세 루트 중에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적다. 그런 걸 감안하면 세 루트 중 가장 덜 호불호가 갈리는 시나리오가 아마 이 루트가 될 거라 생각한다.
4. 마지막인 Heaven's Feel 루트는 나머지 두 루트와는 정말 상반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단 이 루트는 전 루트들에서도 나오는 마토 사쿠라가 히로인이다. 다만 다른 두 루트는 그래도 일상과 전투가 나누어지는 어느 정도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이 루트는 얄짤없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서번트들이 그림자에 몰살당하고 이는 세이버도 예외가 아니다. 거기에 사쿠라는 갑자기 쓰러지고 전 루트에서는 코빼기도 안 나오던 마토 조켄이 대놓고 암약하는 등 대놓고 어두운 분위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Heaven's Feel 루트에서 시로는 기존 루트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전 루트에서 정의를 맹목적으로 외치던 시로는, 이 루트에서 사쿠라를 위해 자신의 정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시로에게 있어 정의는 목숨보다도 소중한 가치였지만, 그는 사쿠라를 위해 그 가치를 과감히 내던진다. 이러한 변화는 Heaven's Feel 루트를 다른 루트들과 완전히 차별화시키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변화는 전 루트들의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지루한 일상 파트를 오히려 흥미롭게 만든다. Heaven's Feel 루트에서 일상 파트는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다. 사쿠라는 쓰러져 의식을 잃고, 세이버와 아처는 부재하며, 시로의 왼팔은 갑자기 아처의 팔로 이식되는 등, 암울한 분위기가 지속된다. 이러한 상황은 플레이어가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간간이 등장하는 밝은 장면들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결국, 일상 파트의 지루함을 해결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밝은 일상 파트의 비중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것이었던 셈이다.
또한, 후반부에 집중된 전투 장면들의 퀄리티는 가히 압도적이다. 특히 시로 대 흑화 버서커 전투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시로라는 캐릭터의 강함과 의지, 그리고 멋을 모두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 전투뿐만 아니라, 후반부의 다른 전투 장면들 역시 플레이어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Heaven's Feel 루트의 중요한 매력 요소이다.
하지만 Heaven's Feel 루트에도 아쉬운 점이 존재한다. 가장 큰 아쉬움은 이 루트의 히로인인 마토 사쿠라에 대한 설정이다. 이 루트에서 사쿠라는 단순한 히로인이나 조력자를 넘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번트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는가 하면, 흑화하여 강력한 빌런으로 돌변한다. 시로는 이러한 사쿠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마저 저버린 채 싸우지만, 다행히 사쿠라가 흑화하게 된 배경과 시로가 신념을 포기하게 되는 과정은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또한 사쿠라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과정 역시 인상적이다.
하지만, 사쿠라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학살자임에도 불구하고, 해피 엔딩 기준으로는 아무런 대가 없이 행복하게 지낸다. 이러한 점은 플레이어의 관점에서 다소 찝찝하게 느껴질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MCU의 버키 반스를 들 수 있는데, 버키 역시 빌런으로 이용당하며 아이언맨의 부모를 살해하는 등 많은 악행을 저질렀지만, 선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속죄하며 살아간다. 반면 Heaven's Feel 루트의 해피 엔딩에서 사쿠라는 버키와 달리 속죄하는 모습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Heaven's Feel 루트의 해피 엔딩을 진정한 "해피" 엔딩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며, 아쉬움을 자아낸다.
5. 이제 페스나의 모든 루트를 살펴봤으니,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에 답할 때가 되었다. 페스나는 과연 문학인가? 아쉽게도, 문학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기서 문학이란, 단순한 이야기 전달을 넘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명작 문학 작품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작들은 문장 하나하나에 깊은 의미와 울림을 담고 있다. 「삼국지연의」와 같은 고전 문학이나, 「1984」와 같은 세계 문학, 혹은 「날개」와 같은 한국 문학처럼 말이다. 아쉽게도, 페스나의 문장들은 이러한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는, 페스나를 문학이라는 너무나도 높은 기준을 두고 평가했기 때문에 나타난 상대적인 비교일 뿐이다. 문학이 아닌 비주얼 노벨 게임의 관점에서 페스나를 바라본다면, 페스나는 충분히 명작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치밀하게 짜인 설정, 개성 넘치는 캐릭터, 긴장감 넘치는 전투, 그리고 질과 양 모두에서 뛰어난 스토리까지, 페스나는 단순한 유행을 탄 게임이 아닌, 고전으로서 명작의 가치가 충분한 게임임을 증명했다. 따라서 비주얼 노벨 장르를 좋아한다면, 페스나를 한 번쯤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는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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