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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도시의 도서관 - (4)

삶은계-란 2023. 4. 19. 23:33

※ 이 글에는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차라리 이 슬픔과 함께 일어설 수 있는 길을 택하겠어. 할 수 있다고 믿으니까...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 필립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제 지쳤어요. 그저 지금 제가 바라는 건... 크게 울고 싶어요.
- 필립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 엘라 휠러 월콕, 미국의 시인

0.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에서 대부분의 손님들은 소모품처럼 쓰인다. 한 번 등장한 손님은 퇴장당하고 두 번 다시 쓰이지 않는다. 결말에서 사실 이들이 소모품이 아니라 재활용품이라는 게 밝혀지는 것을 감안해도 아무리 좋은 스토리가 있는 손님이라도 한 번에 쓰이고 퇴장당하는 것은 좀 안타까운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캐릭터는 아니다. 오히려 이 캐릭터는 차라리 소모품이었으면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 필립은 새벽 사무소에 소속된 평범한 해결사였다.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지만 아직 그 재능을 개화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그를 쌍화차를 잘 타주는 해결사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 그의 삶은 도서관으로 인해 꼬이기 시작했다. 새벽 사무소는 협회로부터 도서관 토벌의뢰를 받았고 필립과 그의 선배 유나, 그의 스승 살바도르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서관은 도시 질병 수준이라기에는 너무 강했다. 살바도르와 유나는 필립을 위해 스스로 시간을 끌고 필립은 그 틈을 타 도망쳤다.

 

 필립이 도착한 곳은 살바도르의 친구였던 오스카가 운영하던 쐐기 사무소였다. 오스카는 이타적인 척하는 필립의 모습을 비난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도서관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오스카와 쐐기 사무소로도 역부족이었다. 오스카는 패배했고 필립은 이번에도 도망을 선택했다. 그러나 필립은 도망 중, 타인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며 도망가는 자신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혐오를 당연히 여기고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딛고 넘어서기로 결심했고 그 순간, 필립은 인간의 자아로부터 나오는 무기, 에고를 발현하게 된다. 필립은 새로 얻은 에고의 힘으로 배는 강해져 도서관과 맞섰다. 하지만 에고의 힘으로도 도서관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필립은 최후를 맞이하려는 순간, 누군가의 도주 장치 덕에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결말을 생각한다면 여기서 숨을 거두는 것이 필립에게는 더 좋았을 것이다.

 

 필립이 눈을 뜬 곳은 8시의 서커스였다. 새벽 사무소가 도서관을 토벌하러 간 사이, 쐐기 사무소는 8시의 서커스를 토벌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새벽 사무소는 쐐기 사무소에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 생각에 필립은 분노했지만 8시의 서커스 단장 오스왈드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오스왈드는 필립이 내면에 품고 있던 망상을 들춰냈다. 사실 필립은 유나를 짝사랑했지만 그는 유나와 살바도르가 불륜을 하고 있다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오스왈드는 그런 필립을 비난하는 유나와 살바도르의 환각을 보여줘 필립을 절벽 끝으로 내몰았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무너진 필립은 결국 뒤틀림의 길을 선택하고 우는 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우는 아이가 된 필립은 또다시 도서관으로 찾아왔다. 우는 아이가 되어 더욱 강해진 필립이었지만 이번에도 도서관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세 명의 아이로 갈라진 우는 아이 중 하나는 탈출에 성공하나 나머지 둘은 결국 책이 되고 말았다. 남은 한 명의 아이는 새벽 사무소가 있던 V사 둥지로 가 마구잡이로 학살을 시작했다. 이를 포착한 전면전 전문의 리우 협회가 우는 아이의 포획을 시도했지만 오스왈드가 소속된 잔향악단에게 가로막혔다. 잔향악단의 단장, 아르갈리아는 필립에게 이성을 되찾아주었고 필립은 잔향악단의 단원이 되었다.

 

 막이 무르익고 잔향악단은 도서관을 침공했다. 필립도 잔향악단의 첼리스트로서 공격에 참여했다. 10명의 단원들은 각각 지정사서들과 1:1 대결을 했는데 필립의 상대는 말쿠트였다. 필립은 말쿠트에게 인간관계의 무용성을 토로하지만 말쿠트는 설사 사람 간의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더라도 이를 통해 얻을 것이 있다고 그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필립은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간 건 도시관이라 말하며 전투를 시작했다. 필립은 이전 우는 아이 때보다도 강해졌지만 이미 타버린 재처럼 무기력했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될수록, 그 안에 남아있던 잔불이 타오르며 더욱더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결국 필립의 잔불마저 꺼져버리며 4번째로 패배한 뒤, 책이 되어 사라졌다.

 

 라고 생각했지만 앤젤라의 희생 덕에 잔향악단은 마지막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잔향악단, 그리고 필립은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빛의 탈취하기 위해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필립은 끝끝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것이 가장 끈질겼던 해결사, 필립의 최후였다.

 

2. 필립은 어떻게 보면 가장 불운한 해결사 중 한 명이다. 그는 재능이 있었고 가능성도 있었다. 비록 불완전했지만 에고를 혼자서 각성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가 하필 워프를 한 곳이 8시의 서커스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미 뒤틀림이 되어버린 오스왈드는 필립을 자신과 같은 위치로 떨어트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결국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던 필립은 무너지고 말았다.

 

 일단, 필립은 이기주의자였고 자신의 이기심을 긍정하고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기 때문에 에고를 각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완전한 에고였던 만큼 그 안에는 죄책감이 분명 있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과 자신이 짝사랑한 선배, 그리고 말은 험하지만 자기를 지켜준 스승의 동료들까지 전부 잃은 것이다. 그는 그런 이기심과 죄책감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기심을 극복했을지언정, 공포까지 극복하지는 못했다. 유나가 자신을 싫어할 거라는 공포, 유나와 살바도르가 이상한 관계일 거라는 공포,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 말이다. 필립은 오스왈드가 속삭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막았다. 결국 공포를 직면하는 것을 포기한 대가는 바로 오스왈드와 같은 부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필립을 동정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고평가를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필립은 분명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망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비슷하지만 다른 예시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카쿄인 노리아키가 있다. 그는 DIO의 카리스마에 굴복하며 DIO의 종이 되었다. 하지만 죠타로에게 구원받은 이후, 그는 공포를 극복하고 DIO와 맞서 싸웠다. 비록 카쿄인이 끝까지 살아남지는 못했지만 카쿄인이 있었기에 죠타로는 DIO를 이길 수 있었다. 필립도 공포를 직면하고 이를 극복했다면 조금 더 좋은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움이 약간 든다.

 

특히, 만약, 필립이 쐐기 사무소 시점에서 도망치지 못하고 죽었다면, 또는 만약 도망친 곳이 8시의 서커스가 아니라 조금 더 정상적인 장소였다면, 어쩌면 필립은 제대로 공포를 직면할 여유를 가지고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뭐,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3. 필립은 맨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다른 손님들과 달리 자주 재활용되는 캐릭터다. 그는 도망가고, 도망가고, 도망가면서 끈질기게 살아남다가 최후를 맞는 그런 부류의 캐릭터다. 그렇기에 그는 유저들에게 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고점에서 보여준 불완전한 에고와 멋진 모습, 그리고 저점에서 보여준 뒤틀림과 추한 모습까지 필립은 분명히 기억남을 캐릭터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이 캐릭터 이야기는 아닌데, 다른 캐릭터들도 필립처럼 적당히 재활용을 했으면 어떴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손님이 일회용품이었던 것은 아니고, 샤오나 R사처럼 도서관에 두 번 입장하는 캐릭터들도 있고, 얀처럼 도서관에는 한 번 오지만 그전에 얼굴을 자주 비추는 인물들도 있지만 결국 기본적으로는 소모품으로 소모된 것 같아서 아쉽다. 물론, 엔딩에서 대부분 살아나기는 했지만 솔직히 후속작인 림버스 컴퍼니에 얼마나 나올 수 있을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이 든다. 특히, 네모처럼 매력적인 씬스틸러가 언제 나올지 모른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쉽다.

 

 그리고 위에서는 언급을 못 했지만 세 명의 우는 아이 중 탈출해 성공했던 것은 하나뿐이고 나머지 둘은 도서관에 잡혀 불안정한 우는 아이의 책이 되었다. 즉, 엔딩에서 책이 된 사람들이 돌아왔으므로 어쩌면 필립은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림버스 컴퍼니, 또는 다른 후속작에서 필립이 도망가는 것을 또 볼 수도 있다. 물론 필립의 생사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과연 필립이 살아있다면 그는 공포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는 정신이 말똥말똥해질 수 있을까? 이런 점들을 기대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