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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도시의 도서관 - (5)

삶은계-란 2023. 4. 20. 19:45

※ 이 글에는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있잖아. 영웅이 뭐라고 생각해?
- 묘
영웅... 나도 정확히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 영웅은 다른 사람이 보는 모습일 뿐이니까.
- 게부라

0. 어렸을 때 우리는 뭔가 대단한 꿈을 꾸며 살았다. 슈퍼맨이 된다든가, 대통령이 된다든가, 그런 꿈들을 말이다. 하지만 자라면서 우리는 그런 꿈들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런 대단한 꿈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결국 평범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다. 이번에 할 이야기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다.

 

1. 묘는 뒷골목에서 자란 평범한 소녀였다. 뭐, 뒷골목에서의 평범함은 우리 생각과는 다르겠지만 그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자. 아무튼, 묘는 뒷골목에서 자랐다. 그러나 뒷골목은 위험한 곳이었고 묘도 조직 간의 항쟁에 휘말려 죽을 뻔했다. 그러나 마침 그 자리에 있던 게부라, 정확히는 칼리가 그녀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칼리에게 구원받은 묘는 그녀를 동경하게 되었고 그녀처럼 강해져 그녀 같은 영웅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수련에 임하게 되었다.

 

 더욱 강해진 그녀는 도시의 날개 중 하나, R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R사는 현실로 따지면 민간군사기업, PMC로 전문적으로 군사 활동에 참여하는 기업이다. R사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큰 전투에 관여했기 때문에 묘는 칼리를 다시 만나기 위해 그곳에 입사했다. R사의 특이점으로 강해진 그녀는 도시의 많은 분쟁에 참여했고 어느덧 L사 호위 임무까지 하며 칼리, 정확히는 게부라를 다시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만났던 소녀였음을 말하지 못했다. 그것은 칼리가 게부라로 변해버려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R사에서 했던 일은 영웅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R사는 결국 민간군사기업, 그들이 하는 행동은 영웅적인 것과는 멀었다. 결국 게부라에게 말을 하지 못한 채, L사는 몰락했고 묘가 소속되었던 4무리는 계륵 신세가 되었다.

 

 R사의 특이점은 복제였다. 묘는 무수히 많은 자신의 복제와 싸워가며 강해졌고 이는 다른 R사의 구성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특이점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고 이를 L사에 의존했다. 그리고 R사는 이 L사 호위라는 임무를 애초부터 나사가 하나씩 빠졌던 R사 4무리에 맡겼다. 하지만 L사가 사라지고 에너지가 부족해지자 R사는 L사의 몰락 원인을 4무리로 돌리며 4무리의 숙청을 고려했고 4무리의 사령관, 니콜라이는 숙청을 막기 위해 4무리를 이끌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묘를 포함한 4무리는 패배했고, 도서관에서 모두 쓰러졌다. 하지만 복제 특이점으로 다시 돌아온 이들은 R사에게 마지막 기회를 받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4무리가 더 강해진 만큼, 도서관도 더욱 강해졌고 결국 이번에도 이들은 패배하며 책이 되었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가지 않았던 나머지 4무리는 R사에게 완전히 숙청당하면서 버림받았다. 이것이 4무리, 그리고 묘의 결말이었다.

 

2. 묘는 기본적으로 칼리처럼 영웅이 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칼리처럼 남을 위해 자신의 힘을 사용하고 타인을 돕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R사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금의 민간군사기업, 그리고 과거의 용병들이 그랬듯이 R사와 묘는 순수히 자기 자신을 위해 힘을 써야 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을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그랬기에 게부라에게 자신이 그때의 그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게부라도 과연 영웅이었을까? L사는 엄연히 날개로 직원들을 갈아 마시는 회사였다. 관리하다가 죽기도 하고, 처분탄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등, L사를 완전한 정의라 보기는 어렵다. 비록 L사가 그렇게 운영했던 것은 엄연한 대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완전한 선이라 볼 수는 없다. 괜히 아인이 단선수악(단 한 가지의 선과 수백가지의 악)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게부라도 우리가 흔히 영웅이라고 부르는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등과는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게부라가 위에 적혀 있는 말을 했던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서 그녀를 영웅이라 불러도 게부라는 그녀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영웅이 무엇인지를 단도직입적으로 정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담보다 훨씬 막장인 도시 기준으로 봤을 때, 게부라든 칼리든 간에 충분히 영웅의 자격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랬기에 붉은 안개의 전설이 온도시에 퍼졌고 묘처럼 그녀를 동경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전설은 림버스 컴퍼니 시점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묘도 칼리를 동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묘를 영웅으로 동경 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묘는 칼리와 달리 그 강함과는 별개로 평범한 도시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묘, 그리고 R사에서 또 인상 깊은 점이라면 바로 복제인간이다. 여느 미래기반, SF라면 으레 나오는 것이 복제인간이다. 그런데 다른 세계관과 달리 도시에서는 복제인간이 금지되어 있다. 이는 복제인간이 2명 이상 공존하면 생기는 모순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과 그의 복제인간 홍일동이 있다고 생각하자. 길동과 일동은 외모, 성격, 지식, 가족관계 모두 똑같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홍일동이 홍길동의 재산을 가자고 소송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면 홍일동이 홍길동을 죽은 뒤, 자신을 홍길동이라 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이라면 이런 고민을 토론이나 대화로 해결하려 노력하겠지만 도시에서의 머리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 문제를 없던 일로 한다. 복제인간이 없었진다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이는 도시에서 금지된 생각할 수 있는 기계도 마찬가지다. 과연 생각할 수 있는 기계는 인간인가? 생각할 수 있는 기계에는 인권이 주어지는가같은 문제를 뒤로 넘겨버리고 그저 없던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도시는 그런 방식으로도 잘만 굴러갔다. R사는 복제인간 금지 조항에 포함된 예외 조항을 적절히 활용하여 그들의 특이점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런 도시의 금기들은 도시의 비인간성과 삭막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어째서 지금 도시가 이리 막장인지를 보여준다. 

 

3. 마지막으로 묘는 L사의 사서들과 앤젤라를 제외하면 거의 없는 로보토미에서도 나온 캐릭터다. 그렇기에 묘가 처음 언급되었을 때, 그리고 다시 등장했을 때, 팬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묘는 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엔딩에서나마 생환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림버스 컴퍼니, 또는 후의 후속작에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캐릭터기도 하다. 다만, 도시의 금기 상, 묘가 2명 이상 살아남는다면 그 미래는 밝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제 앞으로 묘가 다시 나올지, 만약 나온다면 몇 명이나 나올지를 지켜보면 될 것이다. 적어도 로보토미 출신 중 가장 빨리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