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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도시의 도서관 - (6)

삶은계-란 2023. 4. 21. 19:19

※ 이 글에는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안해요… 저는 그냥 지령을 전달할 뿐이에요…
- 얀 비스모크
...모이라이. 내가 가야 할 길을 도시는 알고 있겠지.
- dnlemxflsdis
나는 어떤 경우에도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미국의 과학자

0. 라오루의 도시에는 손가락이라 불리는 범죄조직이 있다. 이들은 총 5개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손가락의 이름을 따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로 불린다. 그중,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에서는 엄지와 검지가 등장한다. 엄지는 솔직히 할 얘기가 없다. 그냥 조금 힘든 군대다. 입대하면 볼 수 있는 조금 과격한 선임들이 가득 찬 그런 조직이다. 그러나 검지는 다르다. 검지는 그들만이 믿는 신비한 지령을 따르는 비밀스러운 조직이다. 그렇다면 검지는 도대체 뭐고 그 지령은 도대체 뭘까? 이 비밀을 검지의 한 불쌍한 전령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보려 한다.

 

1. 얀 비스모크는 검지의 전령으로서 검지에 내려온 지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령은 검지 조직원과 검지의 보호를 받는 사람에게 내려오는 명령으로 그 명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령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바늘 3개를 넣은 케이크를 이웃에게 전달해라.'라는 지령을 받았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지령을 완수해야 한다. 만약, 지령을 지키지 못한다면 검지 대행자에게 처형당한다.

 

 그러나 지령은 이런 직관적인 지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지령도 있기 때문에 지령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자신이 그린 그림을 죽여라.'라는 지령이 내려졌다고 생각해 보자. 자신이 그린 그림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이 지령을 받은 사람은 그림을 찢거나, 죽은 사람의 그림을 그리는 등 노력을 해보았지만 결국 조건을 완수하지 못하고 대행자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작중 검지 대행자들은 이 지령을 초상화를 그린 뒤, 그 사람을 죽이라고 해석했지만 이것조차 올바른 해석인지는 작중에 나오지 않는다. 

 

 얀은 이런 지령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지령을 전달하면 전달할수록 그는 이 괴상한 지령들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래서 얀은 지령을 받은 사람에게 지령을 조금 더 쉽게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검지에 입단하려는 사람을 말리기도 했다. 거기에 얀은 자신이 직접 수행하기 쉬운 가짜 지령을 만들어 진짜 지령 대신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사실 검지 대행자들은 그 지령이 가짜 지령이란 것을 알았지만 그 가짜 지령을 실행하라는 진짜 지령을 따라 가짜 지령을 따랐던 것이었다. 자신이 지령에 놀아나고 있었음을 안 얀은 지령에 환멸을 표하지만 그런 얀에게 대행자들은 지령의 초대장을 줄 뿐이었다. 얀은 새로운 지령을 받고 그 지령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방직자와 수상한 기계들이 놓여있었다.

 

 얀은 방직자에게 어째서 이런 잔인한 지령을 만들었냐고 묻지만 방직자는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고 답했다. 사실 지령은, 도시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발걸음, 빗소리, 고기 써는 소리 등 온갖 소리와 진동을 감지하는 추가 실에 그 소리와 진동으로 만들어진 언어를 기록한 뒤, 이를 방직자가 인간의 말로 해석한 다음 전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령이 만들어지는 방법이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얀은 어째서 이를 막지 않았냐고 따졌지만 방직자는 자신 말고도 지령을 해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 자에게 자신을 죽이라는 지령이 떨어지면 어떡하냐고 반문했다. 더 나아가, 지령은 곧 도시의 언어, 즉, 도시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잔인한 지령이 나타나는 것은 잔인한 도시인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반론하자 얀은 이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얀은 그 수긍과 동시에 애초에 자유의지는 없었다고 자조하면 enlxmfflsdis로 뒤틀렸다.

 

 enlxmfflsdis은 도서관으로 가라는 지령을 받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enlxmfflsdis은 강해진 도서관을 이기지 못하고 책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앤젤라의 선택 덕분에 enlxmfflsdis도 아마 살아나는 데 성공했을 것이고 지령을 따라 검지에 합류했을 것이다. 결국 지령은 틀리지 않았다.

 

 2. 얀 또는 enlxmfflsdis은 라오루에서 매우 인상 깊은 캐릭터 중 하나다. 그가 단순히 자주 등장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도시의 핵심 설정 중 하나인 손가락에 대한 비밀이 풀리기 때문이다. 검지는 지령을 광신하는 집단, 즉 결정론을 믿는 집단이다. 그들에게 자유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의지란 지령, 곧 도시의 의지뿐이다. 도시의 의지는 검지를 움직이게 하고 결국 검지에게 이익이 돼서 돌아온다. 그것이 검지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얀은 그런 검지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증명하려 했다. 가짜 지령을 뿌리고, 지령을 다르게 해석하며 어떻게든 지령을 막아보려 했다. 하지만 지령은 애초에 그것까지 간파하고 있었고 결국 얀이 지령에 굴복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얀은 지령에 패배했고 도시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것이다. 얀의 행동 덕에 검지는 오히려 자신과 지령의 말만을 따르는 뒤틀림이라는 엄청난 이득을 얻었다. 이는 한 명의 힘만으로는 체제를 바꿀 수는 없다는 암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검지가 따르는 지령, 곧 도시의 의지는 무엇일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도시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와 진동이 모여 만들어진 지령 그 자체가 도시의 의지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의문점이 생긴다. 최초의 지령은 그러면 어떻게 탄생했는가? 누가 처음에 지령을 해석하는 베틀과 추 등의 기계를 놓았는가? 이는 게임 내에서도 밝혀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다. 애초에 이런 기계가 없었으면 설사 도시의 의지가 있더라도 이를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검지도 설립 초기에 누군가가 창립했으며 그 누군가가 자신의 부재를 대비해 만든 것이 바로 지령을 만드는 기계라고 생각한다. 창립자가 사라지자 기계가 도시의 의지 중, 창립자의 의지와 일치하는 것만 해석해서 지령을 만든다. 이것이 지령의 기원이자 진실이라고 추측된다.

 

 이는 현실에도 있는 지구 최후의 날 기계와 유사하다. 지구 최후의 날 기계는 냉전 당시, 소련이 만든 기계이다. 이 기계는 핵전쟁 도중, 지휘부가 소멸될 시, 대신 전쟁을 도맡아서 하는 기계다. 물론 그 전쟁은 핵전쟁이며 결말은 인류의 종말일 테다. 아무튼, 지구 최후의 날 기계는 인간의 부재를 대비해 만들어진 기계인데 검지의 지령도 이와 비슷한 시스템일 것이라 추측된다. 

 

3. 이렇게 얀 또는 enlxmfflsdis에 대해 알아봤다. 얀은 손가락 중 하나인 검지의 진실을 어느 정도 알려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고 결정론적 체제에서 자유의지의 무기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스토리 외적이지만 enlxmfflsdis를 깬 다음 받는 카드의 성능도 매우 좋다. 특히, 도시의 의지 같은 경우, 웬만한 덱에는 꼭 들어가는 필수 카드 중 하나다. 검지 역시 현실에서는 찾기 힘든 특수한 조직의 형태를 보여주고 그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묘사해서 조직의 매력을 높였고 앞으로 나올 손가락들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하게 만들었다. 특히, 같이 언급된 엄지가 참신함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결국 검지와 enlxmfflsdis 모두, 잘 만든 조직이자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현재 Leviathan에서 약지의 설정이 어느 정도 공개되었고 Limbus Company에서는 중지의 설정이 약간 공개되었는데 개인적으로 나머지 손가락 모두 검지만큼 완성도가 높게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번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