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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도시의 도서관 - (8)

삶은계-란 2023. 4. 23. 19:59
글쎄올시다 낄낄... 아마도 보이지 않는 실이 이런 일을 벌이고 있을 테지.
- 재헌
인형을 만들 때 담는 내 생각과 감정... 날 이 꼴로 내밀었던 도시에 대한 원망과 부자 놈들에 대한 애먼 분노. 그들이 앗아간 소중한 아들을 살리기 위한 일말의 희망. 그 희망을 없애며 날 절망하게 했던 롤랑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 차마 밖으로 보일 수 없었던 감정을 사람의 살로 감싸 형체를 만드는 거지. 그거 고깃덩이로 채운 불필요한 걸 없애는 대신... 내 속에 응어리진 감정들을 담는 거야. 그렇게 한 번 쏟아내면 숨통이 조금 트이지... 그제야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이러니 내가 이 인형들을 아끼지 않을 수 있겠나?
- 재헌
내겐 줄이 있었지만, 이젠 자유롭지. 더 이상 날 구속하는 것은 없어.
- 울트론,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中

 

0. 라오루의 메인 빌런은 바로 잔향악단이다. 그러나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사실 잔향악단은 실망스러운 점이 좀 있다. 가장 큰 실망이라면 10 : 10 각개 접대라는 게임플레이를 위해 스토리가 희생당한 면이 크다는 점이다. 즉, 각 층마다 전투가 필요하므로 그에 맞는 10명의 잔향악단 캐릭터가 필요한데, 10명을 맞추느라 일부 간부들의 캐릭터성이 희생된 것이다. 솔직히, 필자는 브레멘이 아직도 뭐 하는 친구인지도 모르겠고 그 사람 요리하는 상어 이름도 까먹었다. 그러나 익숙한 얼굴인 필립과 잔향악단의 단장, 아르갈리아를 빼고도 짧은 등장에도 큰 임팩트를 자랑하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재헌이다.

 

1. 재헌은 뒷골목에 사는 평범한 남성이었다. 그는 과거에 길가에 버려진 남자아이를 입양해 키웠었다. 그는 아이를 자신의 친자식처럼 여기며 애지중지 키웠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집에 오는 길, 불법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사고로 죽었다. 아이의 시체는 배려랍시고 현장 보존 상자에 실려서 왔다. 재헌은 그런 아이, 이제는 아이라고도 볼 수 없는 살덩이를 보고 멍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아이가 들고 있던 인형이 들어왔다. 재헌은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살덩이와 인형을 엮기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말이다. 그는 부족한 재료를 충당하기 위해 뒷골목에 버려진 다른 아이의 시체도 가져와 정성스럽게 인형을 기웠다.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재헌은 이것으로 다시 한번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물론, 재헌은 그것이 잘못된 행위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비록 뒷골목에 버려졌다 해도 그 아이의 부모가 있고 보호자기 있을 터였다. 재헌은 그들의 부모가 언젠가는 자신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그를 심판했던 것은 부모가 아니라 한 검은 가면을 쓴 미친 해결사였다. 재헌은 그에게 아들을 위해서라며 빌었지만 그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헌이 만들던 인형과 집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그 남자는 조용히 사라졌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재헌은 인형사로 뒤틀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갈리아와 만나 잔향악단에 합류하게 된다.

 

 잔향악단에 소속된 재헌은 청소부의 아이나 시체 등으로 인형을 만드는 인형사가 되었다. 여러 일을 맡던 재헌이 이번에 맡은 임무는 바로 워프열차 침투였다. 옐레나와 재헌은 일반인으로 가장해, 워프열차에 탑승했다. 그러나 갑자기 워프열차가 갑자기 고장 났고 의문의 공간에서 긴 시간 동안 멈췄다. 승객들이 혼란에 빠져 자해를 하는 등 열차 안이 광기로 가득 차자 옐레나와 재헌은 사람들을 선동해 열차 안에 마을을 만들었다. 그 다음, 마을의 주민을 모두 수술시켜 사랑마을의 괴물로 만들어버렸다. 옐레나가 사랑마을에서 정신적 지주로 활동하는 동안, 재헌은 음흉한 표정을 보이며 1등석으로 향했다.

 

 사실, 워프열차는 고장 따위 난 적은 없었으며 도시를 10초 만에 주파하는 워프 따위는 불가능했다. 워프열차는 3초가 아니라 3천 년 정도의 긴 시간이 필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열차의 원리는 간단했다. 먼저 열차 출발 전, 승객들의 원본을 W사의 특이점으로 저장한다. 그다음, 열차를 다른 차원으로 보낸다. 다른 차원으로 떠난 열차는 몇천 년 정도 떠돌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온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서는 단 10초의 시간 소모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몇천 년동안, 미친 승객들은 어떻게 할까? 미친 승객들은 W사 정리 요원들이 제압한 다음, 그들을 출발 전 저장했던 원본으로 덮어씌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실되는 부분이 약간 있지만 승객들이 눈치챌 정도는 아니므로 괜찮다. 승객들은 이차원에서의 기억은 없고 3초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으로 인식된다. 참,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그러나 W사도 후폭풍은 무서워서였는지, 도시의 부유층들에게는 1등석 사용을 권유해 워프열차 이동시 냉동 수면을 하게 했다. 그리고 1등석에 침입해 모든 진실을 안 재헌은 광소하며 냉동 수면 중이었던 부유층 VIP들을 살아있는 채로, 인형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W사 요원을 비웃으면서 말이다. 인형들까지 도서관으로 성공적으로 보낸 뒤, 재헌과 옐레나는 다시 잔향악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아르갈리아와 함께 잔향악단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던 재헌은 때가 무르익자, 도서관을 침공했다.

 

 도서관에 온 재헌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미친 남자, 롤랑에게 깜짝 선물을 보여줬다. 바로 롤랑의 아내, 안젤리카의 시신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롤랑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재헌은 만족했다는 듯이 표정을 지으며 복수를 만끽했다. 그 뒤, 재헌은 인형을 대동하고 사회과학 층의 지정사서 헤세드와 맞섰다. 재헌은 헤세드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부유한 자들에 대한 분노와 롤랑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인형 제작의 즐거움을 설파했다. 그는 자신이 정성스럽게 만든 안젤리카 인형을 포함한 인형들과 함께 헤세드를 공격했으나 헤세드도 바리바리 들고 온 사기 책장의 힘을 사용했고 결국 재헌은 패배에 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앤젤라의 결단 덕분에 더욱 뒤틀린 채 돌아온 잔향악단은 다시 한번 빛을 탈취하기 위해 도서관에 맞섰다. 재헌도 자신이 만들었던 인형과 거의 똑같이 뒤틀려 돌아왔다. 하지만 한 번 패배한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고 해서 이길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재헌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한 소멸을 당했다.

 

2. 재헌은 아들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도시의 몇 안 되는 개념인이었다. 자기 살 길 바쁜 도시인이 버려진 아들을 입양한다? 이거는 정말 그 사람이 착하지 않은 한 하기 힘든 일이다. 거기에 재헌도 자기 형편 안에서 인형도 사주면서 나름 아들을 잘 대해준 것을 보니 육아 실력도 엄청 나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아들이 죽고 나자 재헌도 맛이 간다. 물론, 아들이 죽어서 슬픈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상식적으로 시체와 인형을 엮어서 아들을 살리겠다는 발상은 뭔가 이상하다. 재헌도 그것을 알아서 인지, 시체의 부모가 나타나면 그들에게 심판받겠다고 다짐은 했다지만 애초에 심판받을 짓을 안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이미 이때부터 재헌은 뒤틀릴 기미가 충분했다.

 

 이에 불을 지핀 것이 롤랑이었다. 뵈는 게 없던 롤랑은 재헌이 수상해 보이자 그냥 인형과 연구실을 불태워버렸고 그 결과 재헌은 뒤틀려버렸다. 그리고 인형사가 된 재헌은 망가진 시체나 인간으로 인형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형이 된 사람들도 소중한 사람이 있었을 텐데, 그 소중한 사람은 재헌 덕에 소중한 사람을 잃은 셈이다. 결국 복수는 복수를 낳았고, 롤랑 덕에 모든 것을 잃은 재헌은 롤랑처럼 타인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재헌의 사상도 인상 깊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만든 부유층에 대한 분노와 함께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도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는 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도서관의 빛을 얻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결국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요지인데, 이것만 보았을 때는 괜찮아 보이지만 결국 이를 위해 재헌은 인간성을 벌이고 인형 만들기에 몰두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결국 뒤틀림과 에고는 한쪽 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정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똑같지만 인간성을 버렸는가, 아니면 유지했는가, 그것이 뒤틀림과 에고의 차이를 만들었다.

 

3. 이렇게 재헌에 대해 알아보았다. 재헌은 잔향악단 내에서도 유독 롤랑과 깊은 악연, 멋있는 슈트핏, 그리고 충격적인 행보로 인기를 끌었고 실제로도 잔향악단의 몇 안 되는 잘 만든 빌런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잔향악단의 캐릭터들이 재헌 수준의 완성도만 있었어도 잔향악단의 평가가 올라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과 분량이 문제였는지, 그렇지는 못해서 좀 아쉬운 감이 있다. 그래도 재헌이라는 캐릭터의 존재만으로 잔향악단은 스토리 내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번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