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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도시의 도서관 - (10)

삶은계-란 2023. 4. 25. 22:56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 롤랑
난 그날 빌어먹을 피아노 앞에서 맹세했어.
내게서 세계를 앗아간 도시에 반드시 같은 상실과 좌절의 슬픔을 안겨주겠다고.
너처럼···
- 롤랑
나는 알고 있나니 내가 죽음의 자리에 드는 날에도
너는 내 마음 속으로 깊이 들어와
나와 함께 가지런히 누우리라.
- 롤랑, 프랑시스 잠의 <고통을 사랑하기 위한 기도> 中
어둠으로 어둠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빛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증오로 종오를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 마틴 루터 킹, 미국의 목사

0.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의 스토리를 단 한 명의 이야기로 압축하라고 하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앤젤라? 롤랑? 지정사서들? 아르갈리아? 설마 필립? 개인적으로는 롤랑을 선택할 것이다. 일단 필립은 얼굴은 자주 비치지만 다른 캐릭터에 비하면 비중이 부족하다. 아르갈리아도 최종 보스이긴 하지만 마찬가지로 라오루가 그의 이야기가 되기에는 빈약하다. 지정사서들의 비중은 나쁘지 않지만 이들은 로보토미 코퍼레이션에서 완성된 캐릭터기 때문에 넣기는 애매하다. 그렇기에 이 연작에서 이들을 소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앤젤라와 롤랑이다. 그리고 앤젤라는 마찬가지로 로보토미에서 탄생한 캐릭터다. 비록 지정사서들과 달리 앤젤라는 라오루에서 완성되기는 했지만 앤젤라의 일대기에는 분명 로보토미가 포함된다. 롤랑은 그렇지 않다. 롤랑의 이야기는 적어도 라오루의 발매 시점에서는 라오루에 완전히 포함된다. 그러므로 라오루의 이야기를 롤랑의 이야기라 할 수 없지만 라오루의 이야기에서 롤랑의 이야기는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라오루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롤랑이라는 걸 의미한다. 그렇기에 롤랑을 이 연작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자고로 가장 맛있는 것은 마지막에 먹는 법이며 용의 눈은 마지막에 그리는 법이다. 이제 조심스럽게 용의 눈을 그려보겠다.

 

1. 롤랑은 도시의 한 뒷골목에서 할머니와 함께 자라났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롤랑에게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쳤다. 검을 휘두르는 법, 몸을 보호하는 법, 도시에서 배신당하지 않는 법. 할머니는 롤랑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사라지자 롤랑은 그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늘 검은 가면을 쓰며 자신의 욕망을 숨긴 채 남의 의뢰만 처리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롤랑에게 하나의 욕망이 피어올랐다. 바로 둥지에서 사는 삶이었다.

 

 둥지는 뒷골목과 달리 날개의 보호 아래에 안전히 보호된 구역이었다. 그는 그런 둥지로 가기 위해 참전자에게 둥지 이주권을 준다는 말만 믿고 연기 전쟁에 참가했다. 연기 전쟁 도중, 롤랑은 연기의 근원을 보게 되는데 너무나도 끔찍한 모습이었다. 롤랑은 기억제거 시술을 받고 모습을 잊는 데 성공했지만 그 모습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만큼은 잊을 수 없었고 도시의 아름다움 아래에 끔찍함이 있음을 깨닫게 된 나머지, 자신을 가면 속에 더욱더 꼼꼼히 숨겼다.

 

 그러던 중, 롤랑은 찰스 사무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특색, '검은침묵' 안젤리카를 만나는데,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안젤리카는 자신을 가면 속에 꼼꼼 숨기는 롤랑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으며 롤랑은 자신에게 친한 척 굴면서 펀치나 해대는 안젤리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안젤리카와 롤랑은 의뢰를 진행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둘의 관계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 날, 롤랑과 안젤리카는 '핏빛 밤' 옐레나를 토벌하기 위한 임무에 나섰다. 방심한 롤랑 덕택에 안젤리카가 피가 빨리는 수고를 하긴 했지만 토벌에는 성공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본 안젤리카는 어째서 가면을 쓰고 있냐고 다시 물었다. 롤랑은 도시의 추한 모습, 그리고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안젤리카는 힘으로 가면을 부수며 모든 일을 자신이 생각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 일을 계기로 롤랑과 안젤리카는 연인, 더 나아가 부부가 되었다. 둘의 금술은 좋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롤랑은 내심 마음속으로 그들이 살고 있던 뒷골목이 안전하지 않다는 걱정을 하며 둥지로 이주하려 했다. 날개의 더러움을 잘 알던 안젤리카는 뒷골목에서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며 롤랑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롤랑은 끝내 안심하지 못하고 친한 친구였던 올리비에의 목숨도 살릴 겸, 둥지 이주권도 얻을 겸, 올리비에를 도우러 도시 멀리 출장을 떠났다.

 

 그리고 롤랑이 집에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끝나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피아노, 이상하게 생긴 검은 형체, 무너져 내린 집, 그리고 수많은 음표들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알아챈 롤랑은 분노한 채, 피아니스트를 죽였다. 하지만 그를 죽였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안젤리카는 죽었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이었다. 롤랑은 살아갈 이유를 잃었고 이대로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었다. 뒤틀림의 원흉을 죽인다. 그것이 그가 살아갈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롤랑은 그 후, 안젤리카의 장비였던 검은 장갑을 끼고 학살극을 벌였다. 그게 소시민이든, 조직이든, 손가락이든 가리지 않고 죽였다. 이런 행보를 보고 사람들은 미친 검은침묵이 학살극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도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한 올리비에는 롤랑을 막으러 갔다. 올리비에는 롤랑이 검은침묵의 장갑을 반납하고 9급으로 강등되는 것을 조건으로 이 일을 무마시켜 주었고 수많은 해결사들의 추적을 피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제는 진짜 살아갈 이유를 잃었다.

 

 매일마다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삶, 이것이 롤랑의 삶이었다. 이를 본 보라눈물은 롤랑에게 접촉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롤랑은 그 제안을 자포자기하는 심경으로 수락했고 보라눈물은 그를 아직 개장 전인 도서관으로 전송했다. 

 

 2. 롤랑이 도서관에서 처음 만난 것은 앤젤라였다. 앤젤라는 살벌하게 롤랑의 사지를 날려버리기는 했지만, 그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빛으로 만든 팔다리를 돌려준 뒤, 그를 총류의 층 지정 사서 겸 그녀의 시종으로 취직시켰다. 앤젤라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약간 어색했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어떻게 친해지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기구한 과거사를 들으며 그녀를 위로하기도 하고, 자신도 자신의 과거를 조금만 알려주며 서로 공감대를 높여갔다. 다른 지정사서들과도 일을 도우면서 금방 친해졌다. 

 

 그러는 동안, 롤랑은 앤젤라 때문에 뒤틀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이 사실을 듣고 분노했지만 일단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하며 그의 감정을 숨겼다. 한 편, 롤랑은 중층의 지정사서들과 이야기하던 도중, 과거를 회상하다 뒤틀리는데, 이를 해결하면서 존재에 의미에 대한 기대, 지켜내는 용기, 기꺼이 믿으며 맡길 수 있는 상대라는 미덕을 얻었다. 그 외에도 롤랑은 필립이 뒤틀리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거나 샤오가 에고를 발현하는 모습을 보고 경탄하는 등, 총류의 층 사서 겸 리액션 담당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어느덧 도서관이 도시의 별까지 성장했을 즈음, 롤랑의 친구였던 올리비에가 속해 있는 하나 협회가 도서관을 방문했다. 올리비에는 특수한 장치를 이용해 앤젤라를 암살하려 했지만 롤랑은 이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올리비에는 결국 롤랑이 도서관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맡은 거냐며 말하면서도 그에게 빚도 갚을 겸, 검은침묵의 장갑을 돌려줬다. 장갑을 낀 올리비에와 롤랑은 과거의 일을 회상하면서 친구처럼 대화하면서도 결국 둘은 서로를 죽여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비에와 롤랑의 대결은 치열했다. 그러나 올리비에는 하나 협회에서 편하게 살며 실력이 무뎌진 상태였고 결국 전성기의 힘을 찾은 롤랑을 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앤젤라는 롤랑에게 사실 특색이었냐고 물으면서도 지금까지의 공을 생각해 없던 일로 넘어가겠다고 말했다. 

 

 전성기의 힘을 되찾은 롤랑은 철학의 층의 비나와 이야기하게 된다. 그녀는 롤랑에게 앤젤라가 왜 탄생했고 어떤 존재였는지 말해주지만 롤랑은 그저 앤젤라를 만든 아인이 미친놈이었다면서 이를 부정했다. 그러자 비나는 롤랑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과거를 상기시켜 강제로 뒤틀리게 했다. 롤랑은 종말새에 침식되어 날뛰었고 비나는 이를 진정시킨 뒤, 그에게 보이는 것만을 보라고 조언했다. 롤랑은 망가진 도시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빼앗았으나 그 이면에는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를 외치며 도시를 방관했던 자신의 탓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이를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가졌다. 그러자 비나는 중요한 것은 도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굴레를 끊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마치,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갈리아와 잔향악단이 도서관의 문울 부수고 난입했다. 아르갈리아는 들어오자마자 롤랑에게 안젤리카의 인형을 보여주었고 이를 보자 롤랑은 이성을 잃고 아르갈리아에 덤벼들었다. 앤젤라는 이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롤랑의 귀에는 어떤 것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다른 이들이 싸우는 동안, 아르갈리아와 롤랑은 둘만의 결투를 시작했다. 그 둘의 실력은 대등했으나 아르갈리아의 야망보다 롤랑의 의지가 더 강했고 결국 아르갈리아는 롤랑에게 패배해 책이 되었다.

 

 롤랑이 전투를 끝냈을 즈음, 다른 도서관의 사서들도 각자 맡은 잔향악단을 쓰러뜨렸고 앤젤라는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단 하나의 책을 손에 넣기 일보 직전이었다. 롤랑은 그녀를 보자마자 본색을 드러내고 그녀에게 칼을 드밀었다. 롤랑은 최후의 순간에 그가 원하던 복수를 하려 했고 앤젤라는 설득을 시도해 보지만 롤랑은 이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려는 듯, 그의 검은 가면을 쓴 뒤였다.

 

 본색을 드러내고 도서관과 싸우는 롤랑은 도서관이 상대했던 적들 중 가장 강대했다. 그는 처음에는 제정신으로 싸웠지만 머지않아 고유의 뒤틀림을 발휘하면서 그가 보았던 연기의 근원의 모습, 그가 함께하고 싶어 했던 안젤리카와 함께하는 모습, 그리고 모든 것에 절망하여 완전히 뒤틀린 모습들로 변해가며 덤볐다. 도서관이 거의 무너지기 직전까지 싸웠던 롤랑이었지만 결국 도서관을 이길 수는 없었고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패배했다. 

 

 패배한 롤랑은 앤젤라에게 자신을 어서 죽이라고 닦달했다. 그러나 앤젤라는 이미 이런 무의미한 순환과 복수에 질려있었고 그녀는 롤랑을 용서하고 대신 자신이 희생하는 결말을 택했다. 롤랑은 처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만났던 사람, 아니 그가 살던 도시라는 곳에서는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결국 자신만을 위해 선택을 하는 도시에서 그런 선택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랬기에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던 롤랑은 앤젤라가 빛의 씨앗을 퍼트릴 준비를 하던 중, 무의식적으로 칼집에서 칼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을 반쯤 꺼냈을 때, 롤랑도 깨달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굴레를 단 한 번이라도 끊어내는 것이라는 걸.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앤젤라를 죽인다면, 당장은 편할지언정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걸. 도시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변해야 한다는 걸. 롤랑은 칼을 거두고 앤젤라처럼 자신도 그녀를 용서했다. 그리고 롤랑은 앤젤라가 사라지면서 도서관 밖으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빛은 도서관 밖으로 나가, 멀리, 더 멀리 퍼져나갔다. 사람들에게 희망과 따뜻함을 안겨주면서...

 

 그러나 롤랑이 감상에 젖어있었을 때, 빛의 영향으로 잔향악단이 되살아났다. 잔향악단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빛을 다시 얻기 위해 앤젤라를 공격하려 했고 롤랑은 자신의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보이며 다른 사서들과 함께 잔향악단을 막았다. 롤랑과 아르갈리아는 다시 한번 일주일 간의 격전을 치렀다. 롤랑은 아르갈리아를 어느 정도 막아내면서 동시에 앤젤라가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를 꺼냈다. 그 뒤, 빛이 사라지던 모습을 보고 분노한 아르갈리아의 틈을 노린 롤랑은 아르갈리아를 완전히 제압했으며 아르갈리아는 마지막 순간에야 그를 인정했지만 롤랑은 그에게 엿이나 먹으라고 말하며 그를 죽였다.

 

 앤젤라는 자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롤랑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롤랑은 감사인사를 받으면서 이제 앞으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더 이상, 앤젤라의 시종이 아니라 앤젤라의 친구로서.

 

3. 롤랑인 어려서부터 자신의 본성을 감추면서 살아왔다. 그건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피해자와 가해자가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있는 도시라는 환경 자체를 본능적으로 혐오해서도 있었다. 그는 늘, 가면을 쓰며 자신과 도시를 분리시키려 했다. 그런 롤랑의 새로운 방어 기제가 바로 그그이이였다. 안젤리카의 그 말을 들은 롤랑은 그 말을 자신의 신조처럼 삼으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도시의 모순을 넘겨왔다. 그랬기에 그는 그제야 가면을 벗고 타인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어 기제는 안젤리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적용된다. 롤랑은 도서관 내에서 꾸준히 진정한 자신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다. 앤젤라가 뒤틀림의 원흉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에도 롤랑은 그녀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앤젤라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지정사서들도 마찬가지다. 롤랑은 마지막 순간 전까지 누구도 믿지 않고, 그의 거짓된 모습을 유지했다. 물론 그렇다고 라오루에서의 롤랑이 완전한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롤랑과 앤젤라, 그리고 일부 사서들과의 친분은 아마 거짓은 아닐 것이다. 다만 100%의 거짓보다는 90%의 거짓과 10%의 진실이 더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라는 걸 생각하면 적어도 롤랑이 의도적으로 진심을 보인 적은 그가 배신하기 전까지는 아마 없었을 거다.

 

 여기서 의도적이라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롤랑이 사서들과 대화하다가 뒤틀렸을 때, 그는 진심을 다해서 자신의 울분을 토한다. 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그가 지금까지 느껴왔던 고통, 분노, 절망을 모두 표출하는 것이다. 이런 울분을 토하는 롤랑을 사서들이 물리치료에 성공한 이후, 롤랑이 나름 깨달음을 얻고 성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국 평소에 쌓인 감정은 제 때 빼야 된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셈이다.

 

 결국 롤랑은 사서들 덕에 미덕을 배웠음에도 굴레를 끊지 못하고 앤젤라를 배신한다. 그렇게 한 이유라면 역시 그는 아직 앤젤라를 믿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는 먼저 배신하는 쪽이 이기는 곳이다. 게임 이론으로 치면 도시의 세계는 무조건 배신 전략(All-D strategy)이 적용되는 사회다. 롤랑도 연기 전쟁 건으로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고 반대로 자신도 과거 플루토의 뒤통수를 쳐 그를 파멸로 내몬 전력이 있다. 그가 먼저 배신을 거부하고 호의를 베풀었을 때, 그는 앤젤라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배신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앤젤라가 롤랑의 배신을 맛본 후 택한 선택은 황금률(무조건 협력)이었다. 그러나 게임 이론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알려진 전략은 팃포탯이다. 상대가 선제 협력을 하면 협력한다, 그리고 상대가 선제 배신을 하면 배신한다. 만약 배신한 상대가 협력한다면 즉시 용서한다. 이 팃포탯 전략은 수많은 게임 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전략이다. 즉, 현실에 적용했을 때, 가장 뛰어난 성과를 가져오는 전략이다. 그러나 앤젤라는 팃포탯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는 팃포탯과 무조건 배신이 만난다면 결국 무조건 배신이 승리하기 때문이다. 팃포탯으로는 무조건 배신으로 가득 찬 도시를 바꿀 수 없다. 그래서 앤젤라는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롤랑이 한 번 더 배신할 수도 있어도, 황금률을 선택했다. 

 

 롤랑은 이를 보고 나서 고뇌했다. 아마도 앤젤라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사실일까? 내 모든 것을 빼었간 앤젤라가 이런 선택을? 도시에 환상체를 푼다고 했던 그 앤젤라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는 앤젤라의 진심을 깨닫고 자신도 앤젤라를 용서한다. 앤젤라도 자신처럼 상처 입은 생명체였다는 걸, 앤젤라도 자신처럼 과거에서 도망치려 했다는 걸,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앤젤라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인정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복수의, 도시의 굴레를 끊은 롤랑은 변했다. 과거의 방어 기제였던 가면도, 현재의 방어 기제인 '그그이이'도 버리면서 말이다. 앞으로 롤랑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후회 없는 삶임은 분명할 것이다.

 

4. 롤랑은 라오루라는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일단 롤랑은 이 게임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이 게임의 가장 중요한 빌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점은 바로 롤랑이 앤젤라, 그리고 플레이어에게 도시를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이다. 로보토미를 해본 사람이나 안 해본 사람이나 솔직히 도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회사 안에서는 도시를 치료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환자의 상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롤랑은 앤젤라와 플레이어에게 도시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9급 해결사라고 능청 떨면서 그는 도시의 생활상, 둥지의 모습, 뒷골목의 생태, 손가락의 움직임을 상세히 알려준다. 이는 게임 내적으로는 앤젤라에게, 게임 외적으로는 플레이어에게 게임을 이해하고 몰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거기에 롤랑은 특유의 유쾌한 성격을 툭하면 사람이 죽어나가는 게임의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롤랑 같은 캐릭터가 없었다면 암울하고 어둡기만 한 분위기로 점철되어 플레이어의 피로도를 높였을 것이다. 실제로 웬만한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작품에는 이런 유쾌한 캐릭터들이 분위기를 풀어주는 데, 이는 과도한 어두움과 진지함이 오히려 작품을 진행하는 데 피로도만 높여 하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롤랑은 딱딱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를 유연하게 풀어주는 분위기메이커를 한다. 거기에 그는 유연함 속에 날카로움 비수를 숨겨놓은 캐릭터기 때문에 캐릭터와 작품의 입체감을 더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스토리 외적으로는 뛰어난 퀄리티의 롤랑 관련 OST나 개성 없는 총류의 층을 캐리하는 롤랑의 전용 덱 역시 작품의 퀄리티를 높인다. 이 작품을 이야기하면서 OST 관련 이야기를 거의 안 한 것이 아쉬울 정도로 롤랑의 테마들은 뛰어난 편이며 초반에 등장한 관계로 별다른 특색이 거의 없는 총류의 층의 특색을 보여준 것도 검은침묵의 책장이다. 이런 점에서 롤랑은 라오루 내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둔 캐릭터며 롤랑의 성공은 곧 라오루의 성공이 되었다. 물론 판매량 측면에서 로보토미가 라오루보다 잘 팔리기는 했지만 로보토미가 라오루보다 더 먼저 나온 게임이며 적어도 SCP와 비슷한 환상체 경영이라는 그럴듯한 콘셉트가 있는 게임과 도서관 배틀 시뮬레이션이라는 근본 없는 콘셉트의 게임에는 천지차이가 있다. 결론적으로 롤랑은 라오루, 아니 비슷한 장르의 게임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공한 캐릭터라 생각한다.

 

5. 이제 이 정도로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의 인물 소개와 함께 스토리 정리를 대충 마쳤다. 사실 몇몇 인상 깊은 씬스틸러가 있긴 한데, 그들까지 적기에는 내용이 방대해져서 생략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라오루의 스토리는 좋은 편이다. 앤젤라와 롤랑이 기묘한 우정을 쌓고 과거에서 벗어나 굴레를 끊고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을 잘 그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상 깊은 씬스틸러들이 활약하며 라오루가 꼭 필수적으로 했어야 할 세계관 설명도 그럭저럭 한 편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템포다. 이 게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1회용 쓰레기처럼 책이 되어 사라진다. 비록 결말에서 대부분 살아나기는 해도 이 작품 안에서 봤을 때는 너무 허무하게 간 캐릭터들이 많다. 특히, 유진이나 네모 같은 캐릭터는 잠깐 등장했음에도 큰 임팩트를 주었는데 이런 캐릭터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템포의 문제점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다.

 

 이 게임의 후반부는 조금 이상하다. 마지막 결전처럼 보이는 잔향악단 전을 끝내면 롤랑이 배신하고 롤랑과 화해한 다음, 바로 총류의 층 완전개방을 하며 카르멘과 맞서며, 완전개방을 끝낸 뒤, 다시 잔향악단이 부활해서 덤벼들고, 잔향악단을 처리하고 난 다음엔, 무려 머리가 행차해서 그들을 막아야 한다. 엄청나게 길고 피곤한 과정이다. 물론 게임 내적으로는 필요하고 전투 자체의 퀄리티는 나쁘지 않으나 너무 과도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개인적으로는 잔향악단 2차전만큼은 빼는 게 잔향악단을 재활용도 할 수 있고 템포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좋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다. 

 

 단점을 더 길게 말했지만 그래도 이 게임의 스토리는 장점이 단점보다 많다. 특히, 복수를 이렇게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을 철저히 보여준 반면교사인 '더 라스트 오브 어스 2'와 비교하면 천지차이로 뛰어나다. 현시대의 게임 중에 이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루며 복수와 용서라는 주제를 잘 다룬 작품이 있을까? 뭐,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 게임보다 탁월한 게임은 얼마 없을 것이다. 만약 재미있고 매력 있는 스토리가 있는 카드 게임을 하고 싶다면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