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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 섬에서 범인을 잡는 게임 - (5)

삶은계-란 2023. 7. 2. 11:46

※ 이 글에는 슈퍼 단간론파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왜 저는 용서해주지 않는 거예요! 자기들이 벌인 일은 금방 용서하는 주제에...
- 츠미키 미캉, 초고교급 보건부원
전염병은 들불과도 같다. 당신은 이를 퍼뜨리는 데 필요한 모든 연료를 빼앗아야 한다.
- 폴 파머, 미국의 의학 인류학자

 

0. 코로나 대유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코로나로 인해 큰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코로나 대유행은 인류가 전염병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슈퍼 단간론파는 코로나 대유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이를 예측했다. 바로 절망병으로 말이다. 

 

1. 초고교급 보건위원 츠미키 미캉은 어려서부터 순진하고 자기주장이 약했다. 문제라면 그 성격 탓에 집단따돌림이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츠미키는 중학교 시절 내내 따돌림을 당하며 고통 속에서 자라야 했다. 그리고 츠미키는 키보가미네에 입학하며 마침내 고통 속에서 해방되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살인 수학여행에서 츠미키의 재능은 빛을 발했다. 비록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재능을 이용한 검시로 사건 해결을 도왔다.  첫 번째 사건에서는 흉기의 정체를 추측해 범인을 좁히는 데 도움을 주었고 두 번째 사건 때는 피해자가 즉사했다는 것을 알려 범인의 트릭을 무력화시켰다. 이렇게 츠미키는 추리물의 흔한 검시 셔틀 1로 끝까지 살아남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상상은 세 번째 동기인 절망병으로 인해 달라졌다. 모노쿠마는 무작위로 절망병을 퍼뜨렸고 그 결과 총 세 명의 학생이 절망병에 걸렸다. 절망병에 걸린 학생들은 성격이 이상해진 것은 물론, 고열 등 신체적 증상도 나타났기에 이들을 격리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들을 보살피는 것은 츠미키의 몫이었다. 츠미키는 성심성의껏 이들을 보살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츠미키도 절망병에 감염되어 버렸다. 절망병에 벌린 츠미키는 정반대의 성격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살인을 하기로 결심했다.

 

 츠미키의 불쌍한 피해자는 바로 초고교급 경음악부, 미오다 이부키였다. 마찬가지로 절망병에 걸린 미오다는 츠미키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츠미키를 믿고 있었다. 츠미키는 그런 미오다를 이용해 완전범죄를 만들 계획이었다. 먼저 츠미키는 미오다를 라이브 하우스로 유인한 뒤, 그녀를 교살해 죽이려 했다. 그러나 마침 옷을 갈아입으러 온 초고교급 일본 무용가가 라이브하우스에 들어왔다. 당황한 츠미키는 우발적으로 사이온지를 죽인 뒤, 미오다를 죽였다.

 

 뜻하지 않게 시체가 두 개나 생기긴 했지만 츠미키는 침착하게 공작을 시작했다. 먼저 미오다의 시체를 걸어둔 뒤, 사이온지의 시체를 기둥 안에 감춰 사이온지가 미오다보다 나중에 죽은 것으로 위장했다. 그다음, 츠미키는 라이브 하우스와 회의실을 연결하는 카메라를 이용한 알리아이 트릭을 만들었다. 먼저, 히나타를 깨워 자신을 목격시킨 뒤, 자신을 미오다처럼 위장해 일부러 자살하는 것처럼 연출을 했고 이를 히나타에게 목격시켰다. 그다음, 히나타와 합류해 라이브 하우스에 있던 미오다의 시체를 보여준 뒤, 히나타가 사람을 부르러 가는 틈을 타, 라이브 하우스에 숨겨둔 사이온지의 시체를 꺼낸 뒤, 라이브 하우스를 밀실로 만들어 자신의 알리바이를 확보했다. 그리고 돌아온 히나타 일행이 라이브 하우스의 문을 땄으니 이건 완전히 츠미키의 계획대로 된 셈이었다. 미오다가 죽고 나서 사이온지가 죽었는데 라이브 하우스는 밀실이고 츠미키는 알리바이가 있다. 이건 완벽한 트릭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트릭은 들켰다. 하필이면 미오다의 시체에 혈흔이 묻은 바람에 사이온지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 들통나버렸고 이를 토대로 츠미키가 미오다인 척 연기를 했다는 사실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츠미키는 모든 범행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색을 드러낸 츠미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절망병은 단순히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츠미키의 절망병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것이었고 그녀는 초고교급 절망, 에노시마 준코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츠미키는 마지막 순간까지 에노시마를 숭배하며 처형당했다. 모두의 충격받은 모습을 뒤로한 채...

 

2. 사실 츠미키가 이번 사건의 범인이었다는 사실까지는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다. 추리물에서 저렇게 순진하고 가녀려 보이는 사람이 범인인 경우는 한두 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츠미키가 저런 식으로 미쳐 돌아가는 사람일 걸 상상한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츠미키가 마지막에 절망을 숭배하며 보여주는 모습들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맛이 간 상태에서도 츠미키의 본질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다. 츠미키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성향을 보이는 데 이는 맛이 간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두에게 수동적이었던 츠미키가 에노시마에게만 수동적으로 바뀌었다는 게 문제다. 츠미키의 수동적이고 자기주장이 약한 성격은 타락했을 때 매우 안 좋게 돌아갔다. 츠미키 자신은 자신이 이렇게 바뀐 것이 에노시마만이 자신을 이해해 줘서 그랬다고 하는 데 이는 사회화 과정에서 가정 교육과 교우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만약, 츠미키의 가정환경이 더 나았거나 교우 관계를 원만히 유지했다면 츠미키는 정말 헌신적인 의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건 만약의 이야기고 츠미키는 초고교급 절망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츠미키는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이게 필자가 츠미키에게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다.

 

3. 솔직히 3챕터는 2 챕터보다도 실망스럽다. 그 원인이라면 바로 부실한 트릭이다. 위에서도 잘 나오지만 이번 사건의 트릭은 시체를 어떻게 감추고 알리바이를 만들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직접적인 살해 과정은 사건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사이온지를 죽인 과정, 미오다의 시체에 사이온지의 혈흔이 묻은 원인 등은 얼렁뚱땅 넘어간다. 이는 슈퍼 단간론파가 추리게임이라는 점에서 매우 실망스럽다.

 

 이렇게 된 원인은 조금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다. 사이온지는 애초에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사이온지는 끝까지 살아남고 대신에 니 다이가 3챕터에서, 쿠즈류가 4챕터에서 죽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작진은 쿠즈류를 마지막까지 살리기로 결심했고 대신 사이온지를 3챕터에서, 니다이를 4챕터에서 죽이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물론 이 변경 자체는 거시적으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사이온지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보단 쿠즈류가 살아남는 게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바뀌는 과정에서 트릭도 잘 바꿨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버린 게 문제였다.

 

 시나리오가 바뀌었다고 해도 사이온지의 죽음을 3챕터의 원래 사건과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제작진들은 그렇지 않고 사이온지를 억지로 사건에 끼워 맞췄다. 그 결과 사이온지는 츠미키의 트릭 발사대로만 활용되고 그녀의 살인 자체는 거의 다뤄지지도 않았다. 이 점은 3챕터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슈퍼 단간론파가 재밌다고 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 슈퍼 단간론파의 2챕터와 3챕터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슈퍼 단간론파의 진가는 4챕터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