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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이버펑크, 플랫포머 - 산나비

삶은계-란 2023. 12. 5. 10:19

0. 2023년은 너무나도 훌륭한 게임이 많이 나온 해였다. 아니, 어쩌면 게임 역사상 가장 명작이 많이 나온 해가 2023년일지도 모른다. 젤다의 전설 티어즈 오브 더 킹덤, 발더스 게이트 3을 필두로, 앨런 웨이크 2, 마블 스파이더맨 2, 바이오하자드 RE:4, 슈퍼 마리오브라더스 원더 등 훌륭한 게임들이 많이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는 한국 게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의 거짓과 데이브 더 다이버는 각각 TGA 롤플레잉 게임상과 인디 게임상의 노미네이트 되는 쾌거를 보여주며 한국 게임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얼마 뒤, 이 황금기에 걸맞은 또 다른 인디 게임이 출시되니 그것이 바로 산나비이다.

 

1. 산나비는 원더포션에서 만든 2D 어드벤처 플랫포머 게임으로 얼리 액세스로는 2022년 6월 21일, 정식 출시로는 2023년 11월 9일에 발매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정식 출시가 되지 마자 스팀 평가 98%로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라는 엄청난 고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산나비를 고평가 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제부터 이를 차근차근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산나비는 기본적으로 플랫포머 게임이다. 그리고 플랫포머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조작감이다. 자기가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조작이 된다든가, 자신의 의도와는 반대로 조작이 된다든가, 조작이 일관적이지 않다든가 한다면 이는 플랫포머 게임으로서 낙점이다. 그리고 산나비는 적어도 이런 문제는 없다. 사슬 팔을 발사해 천장이나 벽에 매달리고, 상대를 공격하며 웹스윙을 하는 액션은 일체의 오류도 없이 편안하고 일관적으로 작동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게임을 하면서 조작감 때문에 억지로 죽거나 불쾌한 경험을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플랫포머에서 중요한 거라면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개성일 텐데 이 역시 산나비는 충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지금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파이더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웹스윙은 재미있다. 공중에 줄 하나를 의지하며 매달리며 나아가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고 그것이 빈약해 보이는 거미줄이 아니라 육중하면서도 든든한 사슬팔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어딘가에 매달릴 때나 사슬 팔로 적을 공격할 때의 호쾌한 타격감이 더해지니 매번 사슬 팔을 발사하는 매 순간이 즐겁다. 

 

 그러나 레벨 디자인에서는 비판의 소지가 있다. 물론 산나비의 모든 스테이지가 구리다는 것은 아니다. 1챕, 2챕 특히 4챕은 훌륭한 레벨 디자인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이를 제외한 스테이지의 레벨 디자인은 그렇게까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튜토리얼이다. 맨 처음에 주인공이 딸과 놀아주면서 이동과 점프, 벽타기를 익히는 튜토리얼은 좋았다. 그러나 그 뒤, 주인공이 훈련장에서 받는 튜토리얼은 좀 아쉬웠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튜토리얼에서 지나치게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쏟아냈다는 점이다. 훈련장에 들어가자마자 웹스윙, 기본 공격, 잡기, 리벤지 대시 등 많은 기술을 접하는데 냉정하게 말해서 하나의 튜토리얼에서 소화하기에는 너무 양이 많다. 특히 리벤지 대시는 익혔을 때 편리하기는 하지만 굳이 필수적으로 튜토리얼에서 배울 필요는 없다. 애초에 노히트로 깨는 모드가 있는 게임인데 리벤지 대시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리벤지 대시는 알아두면 편리하지만 튜토리얼에서 긴 시간을 들여 알려줘야 할 정도로 중요한 기술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튜토리얼에서 과도한 정보를 알려주는 대신 웹스윙과 공격 등만 알려주고 나머지 잡기술들은 스스로 스테이지를 진행하며 익히게 하거나 꼭 잡기술이 필요한 구간이 나오면 그때 가서 알려주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굳이 튜토리얼에서 정보를 과다하게 주입해서 플레이어를 피로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실제로 산나비의 조작법 자체는 그렇게까지 까다로운 고급 기술을 요구하지는 않으므로 정보의 밀도를 낮게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3챕, 공장이다. 사실 공장의 기본적인 컨셉이 그렇게까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일단 기본적인 스테이지 기믹, 스위치 조작과 움직이는 발판은 마음에 들었고 기존 스테이지와 달리 스테이지 안에 잡몹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플랫포밍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한 것도 좋았다. 또 무채색을 이용해 더 어두운 분위기를 형성한 것도 플레이어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그 분위기에 걸맞은 연출이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이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공장은 너무 길다. 이는 공장의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와 역효과를 이룬다. 보통 어둡고 우중충한 스테이지는 짧고 굵게 만들어서 스테이지 자체의 임팩트를 강화하고 어두운 분위기로 인한 지나친 피로도를 줄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공장은 너무 길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적당히 긴장되고 재밌던 스테이지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피곤하고, 질리고, 짜증 나기만 한다. 

 

 공장의 또 다른 문제점이라면 바로 감독관 타임어택 파트다. 이 파트의 문제라면 감독관이 쫓아올 때마다 엄청나게 반짝이는 빛과 함께 발광하고 이를 클리어할 때까지 계속 반복한다는 점이다. 즉, 스테이지를 계속하면 할수록 멋있어 보이던 연출은 자연스럽게 눈살 찌푸려진다. 첫 연출 이후에는 연출의 강도를 줄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건 바로 5챕이다. 기본적으로 1~4챕까지 거쳐왔던 스테이지를 강화된 상태로 강화된 적과 맞서면 헤쳐나간다는 컨셉은 좋다. 하지만 이는 스토리와 엮여 역효과를 낸다. 5챕 진입 직전에 게임의 핵심적인 스토리가 밝혀지면서 플레이어를 뜨겁게 끓어오르게 하는데 5챕이 너무 길어서 5챕 자체가 스토리를 방해하는 재미없는 방해물로 느껴진다. 스토리가 너무 좋아서 게임 플레이가 재미없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이처럼 산나비의 레벨 디자인은 분명 하자가 있다. 그러나 산나비가 하자뿐인 레벨 디자인이 전부라면 아무도 산나비를 호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산나비를 명작으로 만들었을까?

 

2. 바로 스토리다. 산나비의 감동적인 스토리는 이 게임을 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에 기여한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산나비의 장점은 신파의 장점만을 살리고 단점을 버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못 만든 신파의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 이유는 슬프라고 만든 인공적인 공업적 최루탄이 곧 신파기 때문이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인물, 이를 강조하는 클로즈업, 슬픈 음악까지 더해지면 당연히 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신파의 힘이자 가장 큰 강점이다.

 

 그러나 이런 강점에도 불구하고 신파가 비판받는 것은 간단하다. 바로 신파는 너무나도 눈물을 쉽게 짜낼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작품들이 신파에만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파가 포함된 많은 작품들은 그저 후반부에 눈물 짜내기에만 집중하고 전반부를 날림으로 만들어 신파에만 의존하는 B급 작품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산나비는 신파라는 강한 무기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먼저 산나비는 작품의 핵심적인 반전을 여러 떡밥과 복선으로 차근차근 준비했고 이를 한 번에 풀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한데 주인공의 정체의 관한 복선은 3챕에서 많이 풀리고 금마리의 정체의 관한 복선은 주로 4챕에서 많이 풀린다. 그리고 이 두 반전은 주인공의 심상 공간에서 확실하게 풀리는데 그곳에서도 한꺼번에 반전을 밝혀 플레이어를 혼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시간차 기믹 스테이지를 중간중간에 넣어 플레이어가 반전을 보는데 시간을 들이게 만들어 사건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게 했다. 이런 식으로 반전의 강약조절을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플레이어가 벌써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도록 조절했다.

 

 그리고 조절된 감정은 마지막에 폭발하는데 여기서는 신파의 강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펑펑 우는 금마리, 갑자기 도트에서 일러스트로 바뀌면서 보여주는 클로즈업, 슬픈 음악까지 신파를 활용하면서 지금까지 쌓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면서 플레이어의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는 데 성공했다. 특히 빌드업을 꾸준히 해왔던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의 속뜻을 알려주는 장면은 신파의 강점을 잘 살리고 약점을 잘 보완한 훌륭한 장면이었다. 이처럼 산나비는 신파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산나비가 신파만으로 성공한 스토리는 아니다. 참신한 배경설정도 호평하고 싶다. 사이버펑크라는 장르에 조선이라는 한국적 색깔을 강화하는 판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사실 사이버펑크라는 장르가 꽤 한국적인 장르이기는 하다. 지나치게 발달한 첨단 기술, 그에 반비례해서 사라져 가는 인간성은 지금의 동아시아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많은 사이버펑크 작품들은 주로 홍콩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산나비에서는 조선이라는 국가를 내세워 의금부, 철호패, 조정 등 조선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주인공의 복장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는 사이버펑크와 잘 어우러져 산나비만의 독특한, 예스러우면서도 미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는 사이버펑크의 특징은 인간성 상실을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냈다. 조선으로 대표되는 전근대 국가나 사이버펑크의 미래 사회 모두 인권 따위는 무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산나비의 뛰어난 도트 그래픽도 좋은 스토리에 기여했다. 이런 방식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주인공과 주변 상황에 몰입해야 하는데 도트 그래픽이 그것에 한몫했다. 특히 주인공의 딸과 금마리의 도트가 귀여워서 더더욱 아버지로서 주인공에 몰입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감독관이 쫓아오는 장면이라든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중에 마고시의 전경을 보여주는 장면의 그래픽은 정말 뛰어났다. 도트를 찍는데 들어간 정성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3.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산나비는 2023년의 황금기에 걸맞은 훌륭한 게임이다. 비록 레벨 디자인 측면에서 하자가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게임 플레이는 괜찮은 편이며 스토리는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이를 고려했을 때 산나비가 명작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플랫포머나 사이버펑크 또는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할 것이다. 앞으로 원더포션이 만들어갈 다음 게임을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