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엘드리치 - 모든 뉴비들의 꿈과 악몽

삶은계-란 2024. 1. 28. 23:07

0. 과거 많은 한국의 어린이들은 학교가 끝나고 유희왕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물론 그들의 듀얼은 싸이크론으로 효과를 무효로 하거나 앞면 수비 표시로 몬스터를 일반 소환하는 등 개판이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그리나 나이가 들고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며 유희왕은 그들에게 과거의 작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2022년 1월 29일, 유희왕 마스터 듀얼이 출시되었고 그들에게 유희왕은 더 이상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가슴속에 품은 추억과 함께 게임에 빠져든 이들은 십년 넘게 유희왕만 하던 고인물, 그리고 처음보는 덱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이런 그들을 구원해줄 덱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엘드리치였다.

 

1. 엘드리치는 황금경 엘드리치를 주축으로 구성된 함정 카드 위주의 덱이다. 덱의 에이스 몬스터인 '황금경 엘드리치'를 황금향과 엘드릭시르 함정 카드가 보조하는 방식인데 주로 '붉은 피로 물든 엘드릭시르'로 황금경 엘드리치를 소환하고 '황금향의 콘키스타도르'와 '영구히 빛나는 황금향'으로 상대를 방해해 차근차근 승리하는 것이 기본적인 덱의 구조다.

 

 물론 이는 이론상의 덱이고 엘드리치의 현실은 이런 카드에 더불어 강력한 지속 함정을 투입해 상대를 아무것도 못하게 하며 봉쇄한 다음, 그대로 상대를 항복시키는 덱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매우 강력한 지속 함정들 때문이었다. 필드의 몬스터 효과를 무효로 하는 '스킬 드레인', 마법 카드를 무효로 하는 '왕국의 칙명', 특수 소환을 막는 '배너티 스페이스'가 매우 강력한 지속 함정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런 카드들은 다행히도 디메리트가 있다. 이 모든 효과들은 양쪽 플레이어에게 적용되므로 일반적이라면 양쪽 다 페널티를 얻는 카드여야 한다. 하지만 엘드리치는 필드의 몬스터 효과를 발동하지 않으며 마법도 거의 쓰지 않고, 특수 소환도 한 번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카드들은 자신이 할 플레이를 한 다음 키면 상대만 방해할 수 있다는 심각한 맹점이 있었던 관계로 엄청난 사기성을 자랑했다. 그런 관계로 엘드리치는 너무나도 쉬운 난도의 날먹 덱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유희왕이라고는 TV에서 본게 전부거나 혹은 최대가 동네 듀얼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엘드리치가 좋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스터 듀얼은 오프라인 듀얼과 달리 사이드전을 도입하지 않았다. 사이드전이란 듀얼을 단판이 아니라 3판 2선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첫번째 판이 끝나면 미리 준비한 15장의 사이드 덱에서 원하는 만큼 카드를 투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오프라인 듀얼에서는 보통 사이드 덱에 여러 종류의 티어덱을 겨냥한 카드를 투입하곤 하는데 특히 엘드리치처럼 함정 위주의 덱 같은 경우 '해피의 깃털', '라이트닝 스톰', '레드 리부트' 등 마법/함정 견제 카드에 취약하다는 점 때문에 특히 첫 번째 판 이후 사이드전에서 취약점을 보였다.

 

 그러나 마스터 듀얼은 사이드전이 아니라 단판전이므로 오프라인 듀얼처럼 특정 덱만을 겨냥한 카드를 투입하기 어렵고 환경 전체를 생각한 덱 메이킹을 해야했다. 엘드리치가 아무리 많아도 나머지 덱들은 몬스터 위주의 견제이므로 자연스럽게 '해피의 깃털'이나 '라이트닝 스톰' 대신 '금지된 일적'이나 파괴수 등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당연히 엘드리치는 오프라인 듀얼보다 견제를 덜 당하게 되었다.

 

 물론 이 때도 엘드리치가 유일한 티어덱은 아니었다. 트라이브리게이드, 전뇌계, 그리고 드라이트론은 매우 강력한 성능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들은 예전부터 유희왕을 해오던 사람들이 아니라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엑스트라 덱을 융합 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전개 위주의 덱들은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러나 엘드리치는 몇 번의 세트와 효과 발동으로 최고의 빌드를 구축할 수 있었으니 뉴비들에게 너무나도 친화적이었다.

 

 거기에 엘드리치는 가격도 뉴비 친화적이었다. 다른 덱들과 달리 엘드리치 덱의 자체 UR은 '황금경 엘드리치'와 '엘 레이 콘키스타 엘드리치' 뿐이고 후자는 쓰는 사람만 쓰는 카드였으니 당연히 싼 편이었고 소위 말하는 범용들 역시 UR로 도배된 패트랩 대신 값싼 함정 카드들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엘드리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덱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뉴비들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면 바로 미러전이었다. 전통적으로 함정 덱끼리의 미러전은 지루하고 루즈하기로 유명한데 엘드리치 미러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로 수비 표시로 누으면서 버티는 미러전은 당연히 부담스럽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런 미러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뉴비들은 엘드리치를 했다. 그러자 코나미는 엘드리치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2. 엘드리치의 첫 제재는 5월에 벌어진 '황금향의 콘키스타도르' 제한이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제재였는데 바로 오프와는 다른 제재였기 때문이다. 오프에서 엘드리치는 '붉은 피로 물든 엘드릭시르'가 제재 당했지 '황금향의 콘키스타도르'는 제재당하지 않았으므로 '황금향의 콘키스타도르' 제재를 예측했던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금향의 콘키스타도르'는 제한을 받아 덱에 단 1장만 넣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자 사람들은 상대 턴 견제가 약해진 엘드리치가 자연스럽게 약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엘드리치는 빈 '황금향의 콘키스타도르'의 자리를 지속 함정을 많이 넣는 것으로 보충했다. '어전시합', '군웅할거', '센서 만별' 등 상대를 방해하는 강력한 지속 함정을 집어넣으며 엘드리치는 건재함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시작으로 엘드리치가 지속 함정에 의존하는 강도가 더 커졌으니 이 금제는 어쩌면 엘드리치의 추락을 시작하는 금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락은 미래의 이야기고 5월 금제 이후 엘드리치의 위치는 오히려 더 상승했다. 당시 최고의 덱이었던 드라이트론이 추락하고 상검이 떠올랐는데 공교롭게도 엘드리치는 이 상검이 아프게 맞는 '이펙트 뵐러', '무한포영'에 강했던 관계로 사실상 환경 안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 후 용사 토큰의 추가로 단독 최강의 자리에서는 물러나긴 했지만 엘드리치는 매우 강력했고 코나미는 또 한 번 엘드리치를 건드렸다.

 

 8월 금제에서 엘드리치는 '왕궁의 칙명', '배너티 스페이스' 금지, '졸부와 겸허의 항아리' 제한, '스킬 드레인' 준제한이라는 제재를 당했다. 매우 강력했던 지속 함정의 금지, 그리고 그 지속 함정을 쉽게 찾을 수 있는 졸부와 겸허의 항아리 제한으로 엘드리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엘드리치는 빈 자리에 더 많은 지속 함정을 넣는 것으로 응수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카드들이 발굴되었다. '서몬 리미터', '카이저 콜로세움', '마법 봉인의 방향제' 등 지속 함정/마법 카드를 넣은 엘드리치는 그 후로도 승승장구했고 엘드리치는 불멸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엘드리치의 시대를 끝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금제가 아니라 새로운 덱이었다.

 

 2022년 12월, 유희왕 마스터 듀얼에는 지금까지도 강력한 모습을 자랑하는 새로운 덱, 루닉이 등장했다. 이 루닉은 처음 등장하자마자 마스터 듀얼을 평정했는데 이는 엘드리치에게는 매우 큰 악재였다. 그런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먼저 엘드리치는 지속 함정을 이용해 상대를 봉쇄한 다음 공격해서 이기는 방식의 플레이스타일을 유지해왔다. 그런데 루닉 역시 지속 함정을 이용해 상대를 봉쇄하는 플레이스타일을 지녔다. 거기에 루닉은 엘드리치보다 덱 순환이나 유지력에서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루닉의 샘'은 카드를 3장이나 드로우할 수 있었고, '루닉의 날개 후긴'은 루닉의 샘과 지속 함정의 파괴를 막을 수 있었다. 루닉이 엘드리치에게 유일하게 밀리는 것은 UR로 가득 도배된 카드들의 향연, 즉 가격 뿐이었는데 출시 초기 엘드리치로 유입되었던 뉴비들은 UR 가루를 모아 자신만의 덱을 하러 떠나거나 루닉을 만들러 가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루닉과 엘드리치의 비슷한 플레이스타일 때문에 루닉의 금제는 자연스럽게 엘드리치에게도 타격이었다. 엘드리치의 필살기였던 어군센스는 죄다 제한이 되어버렸고 그 외 부스팅 및 서치를 담당하던 항아리도 역시 루닉이 잘 쓴 덕분에 자연스럽게 제한을 받고 말았다. 

 

 심지어 루닉 이하 등장한 카드들도 엘드리치에게는 악재면 악재지 호재는 아니었다. 2023년 4월에는 묘지의 카드를 견제하는 이시즈 파츠가, 2023년 6월에는 묘지의 빛/어둠 몬스터를 제외하면서 특수 소환되는 비스테드가 출시되었다. 둘 다 엘드리치의 강력한 카운터였고 성능도 좋았다. 자연스럽게 엘드리치를 할 이유는 점점 사라져갔고 결국 엘드리치는 티어권 밖에서 하는 사람만 하는 덱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옛날의 티어덱들처럼 말이다.

 

3. 그러나 엘드리치의 부상과 몰락은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엘드리치가 뉴비들의 입문에 도움울 주었다는 점이다. 다른 덱들과는 쉬운 플레이스타일과 값싼 가격은 뉴비들도 부담없이 마스터 듀얼을 플레이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고 이는 마스터 듀얼의 초기 흥행에 기여했다. 만약 코나미가 몇 개월동안 없뎃으로 일관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마스터 듀얼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금보다 많았을 것이다.

 

 또 다른 점은 바로 단판전에서 비대칭 전략의 강력함을 알렸다는 점이다. 현대 유희왕의 주류 플레이스타일인 효과 몬스터와 특수 소환 위주의 플레이가 아니라는 점만으로도 엘드리치는 다른 덱과는 확실히 다른 차별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고 이는 엘드리치의 장기집권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코나미는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훗날 여러 실수를 벌이는 데 이 이야기는 훗날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사점에도 불구하고 엘드리치는 자신이 원래 있던 황금으로 가득찬 묘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내에 엘드리치가 묘지 안에서 뛰쳐나올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애초에 오프에서 신지원이 나와야 마듀에서도 신지원이 나오는데 이미 오프에서 함정 덱의 선두주자는 라뷰린스가 된지 오래니 말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신지원과 함께 엘드리치가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 날까지 황금경의 복귀를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