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드라이트론 -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골프공

삶은계-란 2024. 2. 4. 19:36

0. 골프는 골프공을 골프채로 쳐서 홀에 넣는 스포츠로 총 18개의 홀에 공을 가장 적은 횟수로 넣는 것이 목적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진 이 스포츠는 부유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희왕 마스터 듀얼을 했던 사람들이라면 골프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마스터 듀얼의 초창기를 장식했던 한 덱 때문이다.

 

1. '드라이트론'은 의식 소환을 주로 하는 기계족 중심 테마이다. 의식 소환의 위치가 위치인 만큼 파격적인 컨셉을 들고 나왔는데 다른 의식 테마들이 레벨을 기준으로 의식 소환을 할 때, 드라이트론은 공격력을 기준으로 의식 소환을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드라이트론의 메인 몬스터들은 1이라는 낮은 레벨을 지닌 대신 2000이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공격력을 지니며 이런 메인 몬스터들을 연속해서 전개한 다음 레벨 12의 드라이트론 에이스 몬스터를 소환하는 것이 덱의 골자였다.

 

 그러나 드라이트론 에이스 몬스터는 선턴에 뽑기에는 성능이 아쉬웠고 사람들은 드라이트론 에이스 몬스터 대신 골프공처럼 생긴 한 몬스터를 주목했다. 바로 '얼티미트 디클레어러'였다. 레벨 12에 2000/3000의 스탯을 지닌 '얼티미트 디클레어러'는 일반 소환/특수 소환/몬스터 효과/마법/함정을 모두 무효로 할 수 있는 강력한 효과를 지녔지만 대신 높은 레벨과 12 레벨 치고는 낮은 스탯이라는 페널티도 지닌 몬스터였다. 그렇기에 이전의 덱들에서 '얼티미트 디클레어러'를 사용하기는 어려웠으나 드라이트론은 레벨 대신 공격력을 의식 소환에 참조하므로 기존 의식 소환 위주의 테마들보다 '얼티미트 디클레어러'를 소환하기가 용이했다. 그래서 드라이트론은 '얼티미트 디클레어러'를 주 에이스 몬스터로 사용했고 이는 효과적으로 돌아가 오프 듀얼에서 티어권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드라이트론은 파괴수나 드롤 등 메타 카드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어서 티어권 덱일지언정 메타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유희왕 마스터 듀얼이 출시되자 드라이트론의 퍼포먼스를 완벽하게 예측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트론은 완벽한 파괴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드라이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파괴수나 드롤이었다. 이 두 카드는 드라이트론의 약점을 강하게 찌르는 카드였는데 문제라면 마스터 듀얼에는 이 둘을 넣을 사이드 덱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메인 덱에 파괴수나 드롤을 넣었어야 했는데 당시의 메타 덱으로는 트라이브리게이드, 전뇌계, 엘드리치, 팬텀 나이츠 등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파괴수와 드롤을 피해 가는 덱이었다. 그러므로 메인 덱에 파괴수와 드롤을 넣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드라이트론의 약점도 사라졌다.

 

 이 둘이 없어지자 드라이트론의 선턴 필드는 살벌했다. '얼티미트 디클레어러'의 효과로 상대의 효과 및 소환을 계속해서 막을 수 있었고 필드의 '아이:피 마스카레나'나 패의 '버밀리온 디클레어러'로 상대를 견제할 수도 있었다. 특히 상대의 효과가 뭔지 읽지도 않고 길기만 하면 무조건 막기만 하는 '얼티미트 디클레어러'의 모습과 그렇게 하고도 무난히 이기는 드라이트론의 모습은 사람들을 열받게 하는 데는 충분했고 '얼티미트 디클레어러'는 골프공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드라이트론의 진가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초창기 마스터 듀얼의 운영은 지금과 비교해도 개판이었다. 이는 랭크 시스템으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선후를 정하는 코인 토스 직후 인터넷 연결이 끊겨도 패배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 뜻은 플레이어가 원한다면 선후공을 인위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이는 드라이트론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이른바 랜뽑드트라는 덱이 탄생한 것이다.

 

 기존의 드라이트론은 후공 돌파를 생각해서 덱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패 트랩이나 돌파 카드를 적절하게 투입해야 했다. 드라이트론의 후공은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덱을 만들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선공의 드라이트론의 포텐셜을 떨어트리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랜뽑드트는 랜뽑으로 후공을 배제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선공 빌드에 더 큰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이 뜻은 웬만한 돌파 카드들로는 돌파가 불가능한 수준의 필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랜뽑드트의 선턴 빌드는 방해나 돌파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런 고로 드라이트론의 역겨움은 당시 극에 치달을 정도였으며 초창기의 시선과 달리 마스터 듀얼 최강의 덱은 트라게도 엘드리치도 아니라 드라이트론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드라이트론의 시대는 영원하지 않았다. 먼저 랜뽑이 패치되어 더 이상 랜뽑드트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라이트론의 아드를 책임지던 '사이버 엔젤 -벤텐-'이 제한당하고 말았다. 이제 드라이트론은 패 트랩에 취약한 전형적인 전개 덱 1이 되고 말았고 결국 드라이트론은 티어권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거기에 드라이트론 전개의 윤활유가 되어줬던 '유니온 캐리어'와 견제를 맡았던 '버밀리온 디클레어러' 역시 다른 테마들이 너무 잘 사용한 나머지 각각 금지와 제한으로 떨어지며 드라이트론의 파워는 더더욱 깎였다. 이후 파워 인플레로 인해 드라이트론이 잘 안 보이자 코나미는 제한했던 '사이버 엔젤 -벤텐-'을 다시 무제한으로 풀어줬지만 드라이트론은 돌아오지 못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덱의 최후였다.

 

2. 드라이트론은 초창기에 빈약했던 유희왕 마스터 듀얼의 민낯을 보여주는 덱이었다. 전개 덱의 강세를 예측하지 못하고 드라이트론 금제를 하지 않았던 형편없는 혜안이나 랜뽑 때문에 선후공 유불리가 급격하게 기울어진 상황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은 초창기 26만 명이나 되던 엄청나게 많던 유입들을 줄여버렸다. 유희왕 마스터 듀얼도 다른 TCG처럼 하는 사람만 하는 TCG가 된 것이다. 이런 점은 초창기 마스터 듀얼의 흥행을 생각해 봤을 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훗날 등장한 덱들의 면모를 보았을 때 드라이트론이 아니었어도 어떤 덱이든 유입을 증발시켰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후완다리즈라든가, 루닉이라든가, 티아라멘츠라든가, 이런 점을 고려하면 드라이트론이 모든 비판을 받는 것은 드라이트론 입장에서는 억울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절 드라이트론은 역겨웠고 랜뽑드트는 더욱 역겨웠다. 이 사실은 변치 않을 것이다. 먼 훗날에도 유희왕 마스터 듀얼이 남아있다면 드라이트론은 아마 구전 신화처럼 전해져 내릴 것이다. 마스터 듀얼 최초의 최강 덱이자 역겨운 덱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