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레이튼 시리즈의 첫 작품인 레이튼 교수와 이상한 마을은 성공적인 성적을 거두었다. 약 450만 장 정도가 팔렸는데 이 정도면 엄청 큰 성과였다. IP의 첫 작품, 그것도 어드벤처/퍼즐 장르라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레벨 파이브는 후속작을 준비했으니 바로 레이튼 교수와 악마의 상자이다.
1. 레이튼 교수와 악마의 상자는 레이튼 교수가 그의 스승, 슈레이더에게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누구든 여는 사람은 죽는 악마의 상자를 발견했다는 슈레이더는 편지로 레이튼을 초대했다. 그리고 슈레이더의 집에 도착한 레이튼과 루크는 죽은 슈레이더와 누군가가 악마의 상자를 훔친 흔적을 발견했다. 마침 현장에 떨어져 있던 몰렌트리 특급 열차 티켓을 발견한 레이튼과 루크는 악마의 상자에 숨겨진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 몰렌트리 특급 열차로 향했다.
열차에서 레이튼과 루크는 지나가는 숙녀의 강아지도 찾아주고, 우연히 플로라와도 마주쳐 함께 다니고 중간에 멈춘 마을인 드롭스톤도 탐험하는 등 여러 일을 겪었다. 그리고 마침내 레이튼 일행은 몰렌트리 특급 열차의 숨겨진 진정한 목적지, 환영의 마을 폴센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레이튼 일행은 악마의 상자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마을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상자 전반부의 스토리는 훌륭하다. 시작부터 등장하는 슈레이더의 죽음, 그리고 한 번 열면 무조건 죽는다는 자극적인 악마의 상자의 설정 등 전작의 다소 심심한 설정에 만족하지 못했을 플레이어를 위해 강한 동기를 시작부터 부여했고 이를 전반부에 걸쳐서 떡밥을 훌륭하게 뿌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처음 폴센스에 도착했을 때의 연출과 비주얼은 정말 끝내준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부터 레이튼 특유의 특징, 지나치게 허무맹랑한 진실과 그로 인한 개연성 및 핍진성의 희생이 드러난다. 이는 악마의 상자부터 초문명 A의 유산까지 꾸준히 나타나는 데 이는 레이튼 시리즈의 스토리가 호불호가 갈리는 원인이 된다. 악마의 상자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먼저 폴센스는 말 그대로 환영의 마을이다. 폴센스 내부의 광산에서 올라온 환각 가스가 사람들에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영을 보여주고 있다. 폴센스의 지배자, 흡혈귀 안톤 역시 흡혈귀가 전혀 아니다. 몇십 년 전부터 이를 맡아 할아버지가 된 상태였다.
그런 안톤에게는 연인 소피아가 있었다. 소피아는 예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지만 안톤을 설득하지 못했고 결국 뱃속에 있던 아기와 함께 폴센스를 떠났다. 그리고 그녀가 세운 마을이 드롭스톤이다. 소피아는 시간이 흘러 노환으로 죽었고 그녀의 손녀 카티아가 안톤을 찾아 폴센스로 향했던 것이었다.
악마의 상자 역시 실제로 여는 죽는 상자 따위가 아니었다. 악마의 상자는 안톤이 소피아에게 담긴 편지가 담긴 사랑의 상자였다. 그러나 상자를 장식한 보석의 가치를 눈 뜬 사람이 상자를 손에 넣기 위한 야욕을 품었고 그 과정에서 상자는 열기만 하면 바로 죽는 악마의 상자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상자에도 환각 가스가 있어 그 소문의 여파로 진짜 열기만 하면 환각 가스로 인해 자살해 버리니 이 소문이 온 사방에 퍼져버렸다.
레이튼과 루크가 알려준 진실 덕분에 안톤은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그는 소피아와 다시 만나지는 못했어도 그녀의 손녀인 카티아와 만났고 소피아의 진심을 알았다. 이들은 몰렌트리 특급 열차를 타고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며 이야기가 끝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 진실은 허점투성이이다. 먼저 폴센스는 환각 가스로 인해 정상적인 마을처럼 보이고 실제로는 전부다 환영인 유령마을로 묘사된다. 그런데 어떻게 안톤은 그 마을에서 몇십 년 동안 살아남았는가? 안톤은 자기가 흡혈귀가 된 줄 아는 거지 실제 흡혈귀가 아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다. 도대체 어떻게 안톤이 살아남았는지 의심이 된다. 만약 이게 실제였다면 레이튼과 루크가 발견한 것은 안톤이 아니라 안톤의 시체였을 것이다.
또 소피아의 행적도 이해가 안 되는 것투성이다. 안톤과 대부분의 주민들은 폴센스의 환각 가스와 그로 인한 이상 현상을 전부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의심했다. 그런데 소피아는 유일하게 원인이 환각 가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소피아는 이 진실을 안톤에게 말하지 않고 그저 마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만 말한다. 안톤은 마을의 후계자다. 함부로 마을을 떠날 수 없다. 그런 그를 설득하려면 환각 가스라든가, 임신 여부든 모든 것을 동원해도 모자란데 조금 설득하다가 안 되니까 홀라당 도망간다. 그러고도 죽을 때까지 안톤을 사랑했다는 데 솔직히 진짜인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이걸 감안하더라도 게임의 엔딩은 감동적이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레이튼 교수와 루크가 마을의 비밀을 밝혀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휴먼 드라마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울린다. 특히 마지막 수수께끼와 엔딩은 이 게임이 단순한 퍼즐 게임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또 엔딩 외에도 레이튼과 안톤의 펜싱 대결은 플레이어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런고로 레이튼 교수와 악마의 상자의 스토리라인은 미스터리 요소와 감동, 그리고 때로는 유머까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플레이어를 끝까지 매료시킨다. 전작인 이상한 마을보다 한층 더 깊어진 스토리와 캐릭터 묘사는 이 게임을 단순한 속편이 아닌, 독립된 걸작으로 만들어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개연성 및 핍진성 부족 등이 이 작품의 옥에 티가 되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래도 레이튼 교수와 악마의 상자는 퍼즐 어드벤처 게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성공했다.
2. 다음으로 이야기할 것은 역시 게임플레이다. 악마의 상자의 게임플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수수께끼인데 이 수수께끼의 질이 전작보다도 뛰어나다. 특히 DS의 터치스크린을 활용한 직관적인 조작이 필요한 수수께끼들이 늘어나 게임의 몰입도를 한층 높였다. 예를 들어, 줄을 당겨 물체를 움직이거나, 거울을 조절해 빛을 반사시키는 등의 수수께끼는 단순히 머리를 굴리는 것을 넘어 손끝의 감각까지 자극한다.
난이도 역시 일품이다. 초반의 비교적 쉬운 수수께끼들로 플레이어를 유도한 뒤, 점차 고난도의 수수께끼들을 선보이며 도전 의식을 자극한다. 특히 후반부의 일부 수수께끼들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지만, 그만큼 해결했을 때의 성취감도 크다. 난도 상승 곡선이 다소 가파른 편이긴 하지만 다행히 힌트 코인은 건재해서 너무 수수께끼가 어려워도 엔딩까지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
수수께끼와 스토리의 연계성도 강화되었다. 단순히 전작처럼 스토리 진행을 위한 관문으로써 수수께끼를 배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수께끼의 내용이 실제로 스토리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는 플레이어로 하여금 단순한 수수께끼 풀이를 넘어 게임 세계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로 작용한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레이튼 교수와 악마의 상자의 수수께끼들은 전작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픽 역시 뛰어난데 전작의 아기자기한 손그림 스타일은 유지하되, 더욱 섬세하고 정교해진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 묘사가 돋보인다. 특히 폴센스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살리는 배경 그래픽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애니메이션 또한 한층 부드러워져 컷씬의 퀄리티가 상당히 올라갔다. 이는 스토리에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또 사운드 역시 최고다. 새롭게 추가된 테마들 역시 하나같이 귀를 즐겁게 한다. 특히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배경음악들은 게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완벽하게 보완한다. 퍼즐을 풀 때 흐르는 BGM부터 스토리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곡들까지, 각 상황에 꼭 맞는 음악들이 게임의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린다. 그중에서 백미는 역시 엔딩 테마인데 아코디언과 바이올린이 끝내주고 어우러져 슬프면서도 희망적인 엔딩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보완한다.
3. 결론적으로 레이튼 교수와 악마의 상자는 좋은 게임이다. 전작의 성공을 넘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데 성공했다. 스토리와 게임플레이, 그래픽과 사운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레이튼 시리즈만의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우려냈다. 즉, 악마의 상자는 레이튼 시리즈의 감성을 처음으로 극대화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런 점이 반대로 역으로 작용해서 특유의 허무맹랑한 진실과 개연성, 핍진성 면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점은 좋게 말하면 레이튼 시리즈의 특성이고 나쁘게 말하면 단점이니 아쉽다면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악마의 상자는 재밌는 게임이다. 그 점만큼은 변치 않으니 이런 감성을 좋아한다면 악마의 상자는 괜찮은 게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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