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허버트 조지 웰즈가 1885년, 타임머신을 쓴 이후 시간 여행은 SF라는 장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가 되었다. 그 이유라면 시간 여행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시간여행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호기심과 판타지를 자극하며 동시에 과거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욕망을 제공해준다. 거기에 타임 리프, 다차원 해석, 불가변역사와 가변역사 등 접근법도 다양하다. 그러니 시간 여행은 지금까지도 인기있는 소재로 자리잡았고 수많은 걸작이 탄생했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게임, 슈타인즈 게이트도 그 중 하나다.
2009년 5pb.와 니트로플러스가 Xbox 360으로 발매한 비주얼 노벨 게임 슈타인즈 게이트(Steins;Gate)는 과학 어드벤처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이 게임은 출시 이후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식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작은 회사였던 5pb.는 순식간에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게임을 특별하게 만든 걸까? 시간 여행 소재를 다룬 게임은 많지 않은가? 도대체 왜 많은 시간 여행을 다른 작품 중 슈타인즈 게이트가 명작으로 평가받는지 알아보겠다.
슈타인즈 게이트의 이야기는 라디오 회관 발표회에서 시작한다. 자칭 미친 과학자, '호오인 쿄우마', 아니, 오카베 린타로는 라디오 회관에서 열린 발표회를 본 뒤, 우연히 마키세 크리스의 시신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를 문자로 보내자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실종되고 마키세 크리스는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거기에 그와 친구들이 우연히 바나나를 전자레인지로 익히다가 시간을 넘나드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전화레인지와 D-메일의 시작이다. 이 기계로 과거에 문자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되면서 오카베는 과거를 바꾸고 그로 인해 변화된 현재, 즉 다른 세계선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무해해 보이던 이 능력은 점차 거대한 음모와 얽히게 되고, 오카베는 자신의 선택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는지 목격하게 된다.
스토리 전개는 천천히 시작하지만,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급격히 속도를 높인다. 특히 중반부에 마유리가 죽는 장면을 막으려는 오카베의 시도와 세계를 디스토피아로 만드려는 SERN이라는 조직이 개입하면서 이야기는 숨 돌릴 틈 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결국 오카베는 모든 비극을 막고 '슈타인즈 게이트'라는 새로운 세계선을 찾아내기 위한 고난의 여정을 시작한다.
게임의 가장 큰 강점은 복잡한 개념을 쉽게 풀어내는 능력이다. 존 타이터의 시간여행 이론, 블랙홀, 타임머신, 세계선 등 어려운 과학적 개념들을 게임 속에서 자연스럽게 풀어내 플레이어가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또한 다이버전스 미터라는 장치를 통해 세계선의 변화를 수치로 보여주며 플레이어의 이해를 돕는다.
캐릭터 또한 슈타인즈 게이트의 큰 매력이다. 주인공 오카베 린타로는 처음에는 중2병에 빠진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정한 영웅으로 성장한다. 그의 소꿉친구인 시이나 마유리는 어딘가 부족해보이면서도 강인한 내면을 지닌 매력적인 캐릭터고 그의 친구이자 연구 파트너인 마키세 크리스는 지적인 매력과 츤데레 성격으로 사랑받는 캐릭터다. 이외에도 천재 씹덕 해커 하시다 이타루, 오카베도 뛰어넘는 중2병의 보유자 페이리스 냥냥, 누가봐도 여자인(?) 우루시바라 루카, 그리고 미스터리한 소녀 아마네 스즈하까지, 각각의 캐릭터들은 뚜렷한 개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
특히 오카베와 크리스의 관계 발전은 게임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다. 처음에는 서로 티격태격하지만, 여러 세계선을 넘나들며 함께 고난을 겪으면서 두 사람은 점차 깊은 신뢰와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들의 감정선은 시간 여행이라는 SF 요소와 맞물려 더욱 복잡하고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둘 뿐만 아니라 슈타인즈 게이트의 캐릭터들은 단순히 귀엽거나 매력적인 것을 넘어, 각자의 상처와 비밀, 목표를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이다. 플레이어는 이들과 함께 웃고, 울고, 긴장하며 감정적인 롤러코스터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오카베가 마유리를 구하기 위해 수없이 시간을 되돌리며 겪는 정신적 고통은 플레이어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게임플레이 측면에서 슈타인즈 게이트는 독특한 전화 트리거 시스템을 도입했다. 플레이어는 게임 내에서 오카베의 휴대폰을 통해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된다. 전화를 받을지 말지, 어떤 답장을 보낼지에 따라 스토리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시스템은 단순히 선택지를 고르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몰입감 있는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한다.
비주얼 노벨 장르답게 대부분의 게임 시간은 텍스트를 읽고 대화를 따라가는 데 할애된다. 그러나 이 게임은 단순한 텍스트 게임을 넘어, 정교하게 설계된 분기점과 여러 엔딩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진정한 선택의 의미를 느끼게 한다. 특히 트루 엔딩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은 쉽지 않지만, 그만큼 큰 만족감을 선사한다.
다만 게임플레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전화 트리거 시스템은 독특하고 깊이 있지만 반대급부로 공략 없이는 트루 엔딩에 진입하기 난해하다는 점이다. 처음하는 사람이라면 높은 확률로 캐릭터 엔딩의 탈을 쓴 배드 엔딩을 마주치고 당황했을 것이다. 물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드 엔딩을 수집하는 게 비주얼 노벨이라는 장르의 매력이지만 게임 내부에 힌트를 마련하는 것도 더 좋았을 것이다.
이제 그래픽과 사운드를 이야기하자면 둘은 절묘하게 게임의 분위기를 살린다. 슈타인즈 게이트만의 독특한 일러스트 스타일과 섬세한 배경 디자인은 아키하바라의 독특한 분위기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특히 캐릭터들의 표정 변화와 감정 표현이 뛰어나 텍스트만으로도 생생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배경음악은 긴장감 넘치는 순간에는 심장을 조이는 듯한 멜로디로, 감동적인 순간에는 마음을 울리는 선율로 플레이어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오프닝 테마인 'Skyclad Observer'와 엔딩 테마인 'Another Heaven'은 특히 인상적이며, 게임의 메인 테마곡인 'Gate of Steiner'는 게임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맴돈다. 성우진의 연기 또한 탁월해 캐릭터들의 감정과 성격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결론적으로 슈타인즈 게이트는 비주얼 노벨 장르의 걸작이다. 복잡한 과학적 개념과 감정적인 인간 드라마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이 게임은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깊은 생각과 감동을 선사한다. 선택과 결과, 희생과 구원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독창적인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물론 일부 플레이어들에게는 텍스트 위주의 게임플레이가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고, 초반부의 느린 전개가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초반부에서 오카베의 중2병행동과 다루의 씹덕행동은 버티기에는 좀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간을 견뎌낸다면, 그 어떤 게임에서도 느끼기 힘든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를 좋아하고 SF라는 장르를 좋아한다면 한 번쯤 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엘 프사이 콩그루. 그것이 슈타인즈 게이트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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