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잠깐, 삼국지연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동탁 암살에 실패하고 쫓기는 신세가 된 조조. 그는 진궁의 도움으로 간신히 낙양을 빠져나와 아버지의 오랜 친구, 여백사의 집에 몸을 숨긴다. 하지만 그곳에서 조조는 섬뜩한 말을 엿듣고 만다. 여백사의 하인들이 무언가를 "어떻게 묶어서 죽일까?" 논의하고 있었던 것.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라 확신한 조조는 의심과 공포에 사로잡혀, 결국 하인들은 물론, 자신을 위해 술을 사 오던 여백사마저 제 손으로 죽여버린다. 실상은 끔찍한 오해였다. 하인들은 조조를 해치려던 것이 아니라,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돼지를 잡으려던 것뿐이었다. 이 참극을 목격한 진궁이 조조의 잔인함과 배은망덕함을 질책하자, 조조는 그 유명한 대답을 내놓는다.
"내가 천하를 저버릴지언정, 천하가 나를 저버리게 두지는 않겠다."
(寧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
이 한마디에 담긴 냉혹함. 이는 '치세의 능신이자 난세의 간웅'인 조조의 면모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결국 진궁은 말없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런데 여기, 마치 이 고사를 재현이라도 하려는 듯한 회사가 등장했다. 한때 최고의 전략 게임 명가로 불렸고, '삼국지'라는 불멸의 소재를 게임으로 완벽히 되살려낼 구원자로 기대를 모았던 바로 그 회사.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CA)다. 이번 글에서는 모두가 명작의 탄생을 예감했던 <토탈 워: 삼국>이 어떻게 화려하게 등장했고, 또 어떻게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걸었는지, 그 배신과 저버림의 궤적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1. <토탈 워: 삼국>(이하 삼탈워) 등장 이전, 삼국지 게임의 전통적인 챔피언은 단연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였다. 이 시리즈는 명실상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였고, 특히 <삼국지 11> 시절까지만 해도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보여주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하지만 <삼국지 12>를 기점으로 상황은 급변했다. 코에이 <삼국지>의 퀄리티는 눈에 띄게 추락하기 시작했고, 실망한 팬들은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코에이는 서서히 삼국지 팬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통적인 전략 게임의 강자, CA가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 이름은 바로, <토탈 워: 삼국>이었다.
당시 CA는 <토탈 워: 워해머> 시리즈로 그야말로 '떡상' 중이었다. 이런 배경 덕분에, CA가 만드는 삼국지 게임, 즉 '삼탈워'는 기존 토탈 워 팬들은 물론, 코에이에 지쳐 있던 삼국지 팬들에게까지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2019년, 마침내 베일을 벗은 삼탈워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 보였다. 탄탄한 토탈 워 시스템 위에 삼국지만의 매력을 기가 막히게 버무려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특히 토탈 워 시리즈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중국 시장에서 초대박을 터뜨리며, 최대 동시 접속자 약 15만 명, 첫 주 판매량 100만 장 돌파라는 기념비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삼탈워에도 아쉬운 점은 분명 존재했다. 삼국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유 무장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고, 캠페인 시나리오도 동탁 토벌전 단 하나뿐이었다. 수상전은 아예 구현되지도 않았으며, 게임 밸런스 역시 불안정했다. 물론, 원래 전략 게임이란 게 으레 그렇듯, 이런 초기 단점들은 꾸준한 DLC 출시를 통해 보완되기 마련이다. 팬들 역시 삼탈워가 충실한 DLC 업데이트로 완전체로 거듭날 것이라 굳게 믿었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CA는 여기서부터 제대로 똥볼을 차기 시작한다.
기대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CA가 야심 차게 내놓은 첫 메이저 DLC는 바로 '팔왕의 난(Eight Princes)'이었다. 팔왕의 난? 그렇다. 삼국지 시대가 다 끝나고 한참 뒤, 서진 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던 바로 그 내전이다. 삼국지 본편과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당연히 팬덤은 술렁였다. "이게 왜 나옴?" 하는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당시 삼탈워의 인기가 워낙 뜨거웠기에, "그래도 CA니까 뭔가 보여주겠지", "새로운 시각으로 팔왕의 난을 재해석할 수도 있어"라는 실낱같은 기대감도 공존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처참하게 박살 났다. 팔왕의 난 DLC는 고유 무장이라곤 달랑 8명뿐인, 콘텐츠 부실의 극치를 보여주는 캠페인이었다. 팬들은 싸늘하게 외면했고, 판매량은 폭망했다. 심지어 본편의 문제점들조차 딱히 개선되지 않았다. 삼탈워를 향한 호의적인 시선은 이때부터 급격히 식어가기 시작했다.
CA도 뭔가 느낀 게 있었는지, 이후로는 팬들이 원할 만한 소재의 DLC를 내놓기 시작했다. '천명(Mandate of Heaven, 황건적의 난)', '배신당한 천하(A World Betrayed, 군웅할거)', '흉폭한 야생(The Furious Wild, 남만)', 그리고 '갈라진 운명(Fates Divided, 관도대전)' 등 삼국지의 핵심 시대를 다루는 DLC들이 연이어 출시되며 어느 정도 민심을 수습하는 듯 보였다. 고유 무장들도 조금씩이나마 추가되고 있었다. 팬들은 다시 한번 희망을 품었다. "역시 삼탈워도 다른 토탈 워 시리즈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완성될 거야."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믿음을 산산조각 내는 충격적인 통수가 터지고 만다.
2021년 5월, CA는 '삼탈워의 미래'라는 그럴듯한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온 내용은 미래가 아니라 종말 선언이었다. CA는 DLC '갈라진 운명'을 마지막으로 <토탈 워: 삼국>의 지원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듣자, 모든 삼탈워의 팬들은 그야말로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였다. 삼국지라 하면 응당 떠올리는 대서사, 즉 위촉오 삼국의 피 튀기는 혈투가 아니던가? 정작 삼탈워에는 삼국지의 '심장'이라 할 만한 적벽대전, 유비의 입촉, 한중/형주 공방전, 이릉대전, 제갈량의 북벌 등 핵심 에피소드가 하나도 구현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연히 팬들은 이런 굵직한 사건들이 후속 DLC로 차례차례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CA는 이런 핵심 콘텐츠를 통째로 누락시킨 채, 느닷없이 '지원 종료'를 외친 것이다.
분노한 팬들은 그대로 폭발했다. CA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격분하며 스팀 상점 페이지를 리뷰 폭격으로 도배했고, 그 결과 삼탈워는 순식간에 '압도적으로 부정적' 평가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CA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삼국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작품을 개발 중이니 안심하라"는 앵무새 같은 소리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누가 안심을 한다는 말인가? 한 번 저버린 자가 두 번은 못 저버릴까? 인간 본연의 습성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 번 신뢰를 잃은 자들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팬들이 CA를 철저히 불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몇 년 뒤, CA 내부 관계자의 폭로가 터져 나왔다. 그 "새로운 삼국지 게임"이라는 게 원래 모바일 게임이었으며, 심지어 개발이 취소되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물론 이는 익명의 내부자가 전한 루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후 새로운 삼국지 게임 소식은 감감무소식이고, 최근 CA가 <토탈 워: 파라오>나 <토탈 워: 워해머 3>의 부진, <하이에나스>의 폭망 등 연이은 삽질을 거듭하는 행태를 보면, 이 폭로가 사실일 가능성은 극히 높다. 그렇다. 결국 삼국지 팬들은 CA에게 처참히 버려졌다. 마치 조조의 그 말처럼.
2. 팬들은 코에이에 실망하고 CA에게 기대를 걸었다. <토탈 워: 삼국>은 등장과 함께 우리를 열광시켰고, 삼국지 게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대다수의 전략 게임이 그렇듯 시간이 지나며 DLC를 통해 완성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CA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를 등져버렸다. 삼국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위촉오 삼국의 결정적인 스토리라인들은 모조리 내팽개친 채, 느닷없이 지원 종료를 선언하며 거대한 잠재력을 가진 게임을 미완의 폐허로 남겨두었다. 그나마 내놓은 '새로운 삼국지 게임'이라는 약속마저, 알고 보니 모바일 게임이었다가 취소되었다는 허무한 소문으로 돌아왔다.
이쯤 되면, CA의 행보는 삼국지연의 속 조조의 그 섬뜩한 말과 정확히 겹쳐진다. 자신들의 단기적인 이익이나 알 수 없는 내부 사정을 위해, <토탈 워: 삼국>이라는 엄청난 성공작과 그 게임에 뜨거운 기대를 걸었던 수많은 팬덤을 통째로 저버린 것이다. 조조가 천하를 저버렸듯, CA는 <토탈 워: 삼국>과 그 팬덤을 저버렸다.
결국, 코에이의 몰락 후 삼국지 게임의 구원자가 되리라 믿었던 CA는, 오히려 조조의 길을 따라 스스로 '난세의 간웅'이 되어 팬덤의 신뢰를 짓밟았다. <토탈 워: 삼국>은 그렇게,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어낸 배신 위에 주저앉아 미완의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치세의 능신이 난세의 간웅으로 변모하듯, 촉망받던 회사가 어떻게 스스로의 탐욕과 오만으로 신뢰를 잃고 몰락의 길을 걷는지를 보여주는 현대판 '여백사 사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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