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모두의 칭송을 받는 어둠이자 모두의 조롱을 받는 빛, 모두가 원하는 괴물이자 모두가 저주하는 영웅, 시리즈 최고의 빌런이자 최악의 주인공, 이 상반되는 칭호에 잘 어울리는 캐릭터가 있으니 바로 사라 케리건이다. 스타크래프트 1 특히 브루드 워는 케리건의 게임이었다. 물론 짐 레이너도, 제라툴도, UED도 활약했지만 브루드 워의 주인공은 케리건이었다. 그리고 이는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를 불멸의 명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스타 2는 이야기가 달랐다. 스타 2에서 케리건의 비중은 더 높았다. 그녀만을 위한 하나의 확장팩이 있었고 최종 보스를 잡는 것도 그녀였다. 그러나 스타 2에서 케리건은 그렇게 좋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사실 스타 2의 스토리하면 생각나는 게 가짐어서라는 것부터가 그렇다. 가짐어서... 무너진 스타 2의 엔딩을 상징한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이를 이제부터 차근차근 알아볼 것이다.
1. 스타 1에서 빌런 케리건의 뛰어남은 이미 다른 글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https://jjabcde.tistory.com/11 이 글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이를 참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스타 1 케리건이 왜 뛰어난 캐릭터인지 설명하겠다. 먼저 알아야 할 건, 케리건은 그냥 나쁜 X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타 오리지널 테란 캠페인에서 인간 케리건은 레이너의 히로인이었고, 테란의 영웅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이 깔려 있으니까, 그냥 '나쁜 X'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가 연민 같은 걸 느끼게 되는 입체적인 빌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뒷배경을 다 고려해도, 스타 1에서 케리건이 저지른 악행은 진짜 강렬했다. 레이너 배신 때린 건 기본이고, 그 면전에서 친구 피닉스를 죽여버렸다. 듀크도 죽이면서 동시에 자기 원수인 멩스크는 제대로 가지고 놀았다. 프로토스는? 그냥 장난감 다루듯 했다. 알다리스는 직접 죽여버리고, 라자갈은 제라툴 손에 죽게 판을 짜서 프로토스 전체를 완벽하게 농락했다. 심지어 제라툴마저 죽일 수 있었는데, 굳이 살려 보내면서 조롱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케리건이 얼마나 지독한 악당인지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에 UED 쓸어버리는 장면? 이건 진짜 대단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렇게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철저하고, 치밀하고, 끔찍한 악행들. 그런데 또 그 반대편에는 아픈 과거가 있고, 레이너나 멩스크 같은 인물들과의 기묘한 관계가 얽혀있다. 이 모든 게 합쳐져서 케리건은 진짜 스타크래프트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하고 완성도 높은 빌런이 된 거다.
자, 이제 문제의 스타크래프트 2로 넘어가 보자. 첫 이야기인 <자유의 날개>에서 케리건은 일단 익숙한 빌런, 칼날 여왕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제라툴이 불쑥 나타나 이한 수정이라는 걸 레이너에게 건네주면서 이야기가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그 수정 안에는 제라툴의 기억이 담겨 있었는데, 거기서 죽은 줄 알았던 태사다르가 떡하니 나타나서는… 놀랍게도 케리건이 우주를 구할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태사다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참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든 이걸 본 레이너는 갑자기 노선을 바꿔 케리건을 죽이는 대신 저그 감염에서 '치료'해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마지막 미션에서는 친구였던 타이커스까지 자기 손으로 죽여가면서 기어코 케리건을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스타 1을 뒤흔들었던 희대의 악녀는 너무나 허무하게 '인간'으로 돌아와 버렸다.
솔직히 '케리건이 우주의 희망'이라는 플롯 자체는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군상극에서 절대악 아몬을 막기 위해, 또 다른 거악인 케리건과 어쩔 수 없이 손을 잡는다는 전개?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 하지만 <자유의 날개>는 그런 복잡한 과정 다 생략하고, 그냥 젤나가 유물이라는 편리한 도구로 케리건을 너무 쉽게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건 그냥 케리건을 순식간에 선역으로 세탁해버린 거나 마찬가지다. 스타 1에서 그토록 매력적이던 악역 케리건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지워버린 셈이다.
하지만, 그래, 여기까지는 아직 괜찮다고 칠 수도 있었다. 왜냐? 다음 확장팩, 케리건이 주인공인 <군단의 심장>에서 이걸 잘 수습하고 만회할 기회가 있었으니까. 인간으로 돌아온 케리건을 잘 다루기만 한다면, 그녀의 근본(타락하기 전)은 선한 인물이었으니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을 거다. 마치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 시절의 감성을 되살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군단의 심장>은 우리의 기대를 처참하게 박살냈다.
<군단의 심장> 스토리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케리건이라는 캐릭터 그 자체였다. 제작진이 의도했던 케리건의 모습은 아마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였을 거다. 옆 동네 게임으로 치면 일리단 스톰레이지 같은 느낌으로 만들고 싶었겠지. 진짜 문제는, 케리건이 저지른 악행의 스케일과 잔혹함이 일리단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끔찍했다는 점이다. 특히, 플레이어들이 직접 겪고 느꼈던 배신과 상실감은 너무나 컸다. 그래서 <군단의 심장>에서 케리건은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가 아니라, 그냥 자기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 위선적인 캐릭터로 보일 뿐이었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워필드 장군의 최후 장면이다. <자유의 날개>에서도 호감 가는 참군인이었던 호러스 워필드는 차 행성에서 케리건에게 패배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는 부하들만이라도 살려달라며 케리건에게 자비를 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레이너 이야기를 꺼냈다는 이유로, 케리건은 자신을 인간으로 되돌리는 데 힘썼던 은인이나 다름없는 워필드를 배은망덕하게도 잔인하게 살해해버린다. 비록 정치적으로 적이 되었다지만, 이건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천인공노할 짓이지.
물론, 그 직후 케리건은 워필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줘 부하들은 살려 보내준다. <종족 전쟁> 시절 UED 패잔병들을 몰살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케리건의 행동은 이도 저도 아니다. 완벽한 악당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웅도 아니다. 제작진은 이걸 '안티 히어로의 고뇌' 같은 걸로 포장하고 싶었겠지만, 케리건의 기존 이미지가 워낙 잔혹한 빌런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런 어정쩡한 행동을 보고 매력을 느끼기는커녕 위선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제라툴과 만나는 장면은 더 가관이다. 제라툴은 케리건 때문에 스승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고, 평생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게 된 인물이다. 그런 제라툴이 개인적인 원한을 꾹 참고, 오직 우주의 미래를 위해 케리건에게 원시 저그의 힘을 받아들이라는 조언까지 해준다. 그런데 케리건의 반응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다짜고짜 제라툴에게 선공을 날린다.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케리건을 보자마자 죽이려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그런 제라툴의 대의를 위한 행동에 저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케리건이 제라툴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케리건을 매력적인 안티 히어로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냥 상식과 공감 능력이 결여된 위선자로 보일 뿐이다.
이러니 <군단의 심장>에서 케리건은 매력적인 캐릭터가 될 수 없었고, 이는 <군단의 심장> 자체는 물론 스타크래프트 2 스토리 전체를 망가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토리의 주인공이 이토록 비호감인데 이야기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있나? 레이너, 제라툴, 심지어 아르타니스조차 케리건보다는 훨씬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결국 이 문제는 스타크래프트 2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스타 2 에필로그에서 케리건은 뜬금없이 젤나가로 선택받는다. 제작진의 의도는 아마 '착해진' 케리건이 아몬을 무찌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잠깐, 젤나가라는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 승천하는 게 과연 '희생'인가? 뭐,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식으로 그게 희생일 수도 있다고 억지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다. 케리건은 젤나가가 되어 아몬을 박살 낸 뒤, 엔딩에서 멀쩡히 인간 모습으로 레이너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레이너가 "드디어 올 것이 왔군."이라고 말하며 게임이 끝나는데, 이건 뭐 책임이고 희생이고 다 내팽개치고 그냥 레이너랑 둘이서 알콩달콩 살려고 돌아왔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이건 희생이 절대로 아니다. 엔딩 시점에서 케리건은 우주 최강의 신적 존재가 되었고, 그토록 사랑했던 레이너와도 재회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뭐, 레이너는 필멸자라 수명이 다르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젤나가의 힘이라면 레이너 수명 늘려주는 것쯤이야 일도 아닐 거다. 결국 케리건은 자신의 그 모든 악행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완벽한 해피 엔딩을 맞이한 거다. 이게 과연 안티 히어로에게 어울리는 결말인가? 위에서 비교했던 일리단의 경우, 그의 결말은 살게라스가 갇힌 판테온의 감옥을 영원히 감시하는 간수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도 좀 뜬금없긴 하지만, 일리단답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티란데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먼 결말이다. 하지만 케리건은? 신이 되어서 레이너랑 잘 먹고 잘 산다. 이게 끝이다. 케리건보다 훨씬 위대하고 영웅적인 삶을 살다 아르타니스를 살리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 제라툴은 아이어 수복조차 보지 못하고 떠났는데, 온갖 악행을 저지른 케리건은 우주적 존재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산다. 이야말로 진정한 '권선징악'이 아니라 '권악징선'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결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2. 이렇게 케리건은 위대한 빌런에서 실패한 주인공으로 전락했고 이는 스타크래프트 2의 스토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유명한 가짐어서, 이게 다 케리건이 억지로 선역이 되서 생긴 사단이었다. 그렇다면 왜 케리건은 도대체 선역이 됐던 걸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역시 크리스 멧젠의 노화다. 블리자드 게임의 모든 스토리를 담당하는 크리스 멧젠은 젊은 시절에는 블리자드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선호했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가족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더 밝은 분위기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디아 3나 스타 2의 분위기가 전작보다 밝은 것도 그것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해도 케리건의 선역화는 무리수였다. 케리건은 악역이었기에 빛나는 캐릭터였고 이를 선역으로 만드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정이었다. 블리자드는 이를 실패했고 그 결과 스타 2 스토리 역시 안 좋은 방향으로 흘렀다. 만약 케리건이 악역이라는 기존 방향을 그대로 유지했더라면 스타 2는 그 밝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타이커스나 자가라 등 매력적인 신캐릭터의 힘으로 충분히 좋은 스토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스타 2는 케리건이라는 여왕을 구하려다가 왕국 전체를 불태워버린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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