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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이 모여 범인을 잡는 게임 - (2)

삶은계-란 2023. 5. 6. 10:54

※ 이 글에는 단간론파 1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난 말이야, 야구 같은 거 전혀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지금껏 연습한 적도 없고...
- 쿠와타 레온, 초고교급 야구선수
노력하지 않고 무언가를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천재라고 한다면, 저는 절대 천재가 아닙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 끝에 뭔가를 이루는 사람이 천재라고 한다면, 저는 천재가 맞습니다. 
- 스즈키 이치로, 일본의 야구선수

 

0.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이 24601이라는 죄수번호가 있는 것처럼 쿠와타 레온은 11037이라는 죄수번호가 있다. 도대체 그는 왜 11037이라 불리는 걸까? 그도 가난한 형편에 빵 한 조각을 훔쳤던 걸까? 아니면 감옥에서 탈옥을 5번이나 시도해서 그런 걸까? 쿠와타 레온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의 딱한 사정을 들어보자.

 

1. 쿠와타 레온은 잘 나가는 고등학교 야구선수였다. 타자면 타자, 투수면 투수 양쪽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폼을 생각하면 NPB는 물론이요 MLB 진출까지 노려볼 수 있는 뛰어난 성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야구보다는 음악 쪽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의무적으로 공을 던지고 공을 치는 것에 지쳐있었고 여자도 꼬실 겸, 그의 장래를 음악으로 잡았다. 물론 야구와 달리 그는 음악적 재능은 전혀 없었다.

 

 그런 삶을 살던 중, 쿠와타는 키보가미네에 입학했다. 물론 제대로 된 학원이 아니라 살인게임장이었고 쿠와타는 살인게임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경박한 말투 덕분에 쿠와타는 마이조노의 타깃이 되었고 그는 야밤중, 마이조노의 초대를 받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이조노가 자신에게 넘어왔다는 생각에 싱글벙글했던 쿠와타는 망설임 없이 마이조노의 방으로 갔고 그를 반겨주는 것은 자신을 반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려 드는 마이조노였다. 

 

 하지만 쿠와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게 자신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파악했다. 자신의 오른편에 있던 모조검을 눈치챈 쿠와타는 모조검으로 식칼을 든 마이조노의 손을 강타했다. 야구공조차 멀리 담장 밖으로 보내는 쿠와타의 강스냅에 맞은 마이조노는 고통스러워하며 칼을 놓쳤고 곧바로 샤워실로 도망갔다. 그러나 분노와 혼란 속에 어쩔 줄 모르던 쿠와타는 일단 마이조노를 쫓아 샤워실로 가려했다. 하지만 마이조노의 샤워실, 정확히는 나에기의 샤워실은 손잡이가 고장 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문을 열지 못했다. 여기서 이를 안 쿠와타가 머리를 식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쿠와타는 자기 방으로 돌아간 다음, 굳이 서랍에 있는 공구세트를 꺼내 다시 마이조노(나에기)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칼을 든 뒤, 공구세트로 조심스럽게 문을 딴 뒤, 칼로 마이조노를 죽였다. 그다음 쿠와타는 현장을 정리했다. 방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청소하고 피 묻은 옷을 자신의 야구실력을 이용해 인멸했다. 그러나 쿠와타는 그 과정에서 마이조노가 남긴 다잉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했다.

 

 머지않아 학급재판이 열리고 쿠와타는 너무나도 쉽게 검거되었다. 마이조노가 남긴 다잉메시지 11037은 사실 거꾸로 레온을 쓰려다 만 흔적이었고 소각장에 남은 타다 만 옷가지, 그리고 공구세트의 유무를 지적받자 쿠와타는 무너지고 말았다. 쿠와타는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한 채 강제로 모노쿠마에게 끌려가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쿠와타의 최후였다.

 

 2. 사실 쿠와타는 어떻게 보면 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살인을 의도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마이조노가 시도한 살인에 휘말린, 희생양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살인에서 벗어난 뒤 그의 대처는 잘못되었다. 그의 가장 좋은 선택지는 마이조노와 대화하는 것이었다. 마이조노는 이미 흉기였던 칼을 떨어트렸고 손목에도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무리 마이조노가 아이돌 생활을 하면서 체력이 괜찮은 편이라 해도 야구선수인 쿠와타의 완력을 이기는 것은 무리다. 결국 상황의 축은 쿠와타에게 있었고 그 상황에서 진솔하게 대화했다면 쿠와타도 어쩌면 상황을 잘 빠져나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선택을 하기는 어렵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과 바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성인군자들이나 할 법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쿠와타는 두 번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바로 도망이다. 쿠와타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잠근다면 마이조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비록 불안한 잠자리를 자겠지만 적어도 내일까지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쿠와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다음 공구세트로 문을 따, 마이조노를 죽인다는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이유는 크게 2가지라 생각된다. 첫 번째는 쿠와타가 말 그대로 탈출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쿠와타처럼 야외활동을 즐기는 외향적 성격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내부에 갇혀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폐소공포증이라는 질병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마이조노처럼 탈출이 엄청 절실하지 않아도 눈앞에 놓인 공짜(?) 탈출 기회를 놓치는 것은 너무 아까웠을 것이다.

 

 두 번째라면 그가 가만히 버텨 내일이 온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슴푸레 짐작했다는 점이다. 마이조노는 초고교급 아이돌로 남자들은 물론이요 여성들의 호감도 사고 있다. 그녀가 만약 학생들에게 쿠와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쿠와타의 인생은 그걸로 끝일 거다. 마이조노와 쿠와타의 평판을 비교했을 때, 누가 봐도 쿠와타가 훨씬 밀린다. 쿠와타는 졸지에 지지도 않은 죄를 누명 쓰고 범죄자 취급받고나 최악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걸 걱정한다면 살인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역적으로 몰려 죽을 바에는 차라리 진짜 역적이 되겠다. 그것이 쿠와타의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두 번째 경우는 결과론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토가미와 키리기리는 마이조노의 거짓에 속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토가미는 그 장면을 방관하며 팝콘이나 먹었겠지만 키리기리라면 마이조노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쿠와타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를 구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재판도 하기 전의 시점에서 키리기리가 그렇게 뛰어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쿠와타가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살인을 선택하지 않고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살인을 한 이상, 이미 쿠와타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에 추하게 정당방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살인은 학급재판은 커녕 현실 법원에서도 정당방위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방까지 도망친 시점에서 무슨 정당방위가 인정되겠는가. 결국 쿠와타의 결말은 처참한 처형이었다.

 

3.  쿠와타의 죽음은 플레이어에게 큰 임팩트를 주었다. 물론 그가 검거되는 과정은 역전재판의 흔한 튜토리얼 범인이 잡히는 과정이긴 했다. 그러나 그의 처형은 달랐다. 범인이 검거되자마자 바로 처형을 하는 시스템은 플레이어에게 바로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자세한 처형 과정은 잔인하므로 생략하겠지만 이런 쿠와타의 죽음은 다른 추리 게임과는 다른 단간론파만의 차별화를 가져왔다. 이제는 그의 상징이 되는 11037도 인상적인데, 이 숫자는 놀랍게도 후속작에서 나에기가 설정한 비밀번호로 언급된다. 커뮤니티에서도 쿠와타 레온과 11037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숫자가 된 걸 생각하면 그만큼 게임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첫 번째 사건의 임팩트는 크게 다가온 모양이다. 

 

 이렇게 쿠와타 레온에 대해 알아봤다. 그에게 딱한 사연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정할 정도로 불쌍한 친구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처형은 큰 임팩트를 가져왔고 이는 단간론파 1편의 1챕 완성도에 큰 기여를 했다. 다만, 우발 살인이라 그런지 트릭 자체는 심심하고 아쉽긴 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프롤로그를 보고 도망갈까 하던 사람들을 붙잡는 데는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필자도 진지하게 프롤로그 이후, 게임을 때려치울까 고민했지만 1챕을 하고 나서 그런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런 만큼 쿠와타는 단순히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존재임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