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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들이 모여 범인을 잡는 게임 - (3)

삶은계-란 2023. 5. 7. 20:38

※ 이 글에는 단간론파 1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더 강해지고 싶어.
- 후지사키 치히로, 초고교급 프로그래머
나는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어... 그러니,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단 말이야!
- 오오와다 몬도, 초고교급 폭주족
두려움이 없는 것이 용기가 아니다. 그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용기다.
- 마크 트웨인, 미국의 작가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 공자, 중국의 유학자

 

0. 혹시 조하리의 창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조하리의 창은 인식의 영역을 네 개로 나눈 창문이다. 창문의 네 구역은 각각 누구든지 아는 공개된 영역, 타인만이 아는 보이지 않는 영역, 자신만이 아는 숨겨진 영역, 그 누구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중 중요한 것은 바로 숨겨진 영역이다. 숨겨진 영역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가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고 얼마나 자신이 드러나는지를 좌우한다. 그렇다면 이 숨겨진 영역이 극단적으로 큰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1. 후지사키 치히로는 어려서부터 뛰어난 프로그래머였지만 귀엽고 몸이 병약하며 너무 여렸다. 그랬기에 후지사키는 자신의 몸과 부족한 남성성에 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누가 봐도 여자처럼 생겼지만 사실 후지사키 치히로는 남자다. 하지만 그는 부족한 남성성에 스스로도, 타인이 하는 말에도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러자 그는 여성으로 자신을 위장했다. 사람들은 누가 봐도 귀여운 여자 아이처럼 후지사키에게 더 이상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여자를 그를 보면 볼수록 후지사키가 갖고 있던 부족한 남성성에 대한 콤플렉스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키보가미네에 입학했고 살인게임에 휘말렸다. 첫 번째 사건은 그럭저럭 넘어갔지만 두 번째 사건이 문제였다. 모노쿠마는 그를 직격 하는 동기를 주었다. 바로 그가 숨기고 있는 비밀 말이다. 자신이 사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비밀은 무척이나 큰 비밀이다. 엉덩국의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라는 작품이 괜히 히트를 친 게 아니다. 물론, 후지사키가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후지사키는 72시간 내에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겠다는 모노쿠마의 동기를 듣자 어떻게 할지 전전긍긍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이 폭로를 자신의 부족한 남성성을 키우는 계기로 삼자고 결심했고 학생들 중 가장 남성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오오와다 몬도를 찾아가 먼저 이 비밀을 고백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이 파국의 원인이었다.

 

 오오와다 몬도에게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그는 겉으로 봐서는 가장 남자답고 강해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왜 남학생이라고 하면 아무리 오오와다라 해도 오오가미는 못 이길 것 같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쾌속을 추구하는 폭주족인 전형적으로 우월한 알파메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그런 남성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인간이었다. 그는 키보가미네에 입학하기 전, 그의 형과 목숨을 건 레이스를 했고 그의 실수 때문에 그의 형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오오와다는 그의 형의 유지를 이어 폭주족의 리더가 되었고 그는 조직을 유지시키기 위해 형이 자신을 억지로 추월하려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오오와다에게 후지사키가 진실을 말했다, 자신은 남자고 자신도 오오와다같은 멋진 남자가 되고 싶다고. 하지만 오오와다는 멋진 남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니, 자신의 비밀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던 오오와다와 달리 후지사키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오와다에게는 후지사키야 말로 자신보다 더 남자다운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용기와 강함을 질투했다. 남자는커녕 여자나 어린아이에게도 질 법한 사람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간이라는 것에서 모멸감을 느꼈다. 오오와다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아령으로 후지사키를 내려쳤다. 

 

 오오와다는 황급하게 사건 현장을 조작했다. 그는 사건이 벌어진 남자 탈의실을 여자 탈의실인 것처럼 위장했다. 그것은 자신이 용의자에서 벗어나려는 것도 있었지만 후지사키가 남자였다는 사실을 감추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치, 자신이 형이 죽은 원인을 바꾸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의 현장 조작은 토가미에게 바로 걸리고 말았다. 비록 토가미가 재미 겸 자신에게 위협이 될 사람을 찾기 위해 오오와다에게 유리하게 현장을 조작하긴 했지만 이는 재판 도중 나에기에게 간파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후지사키를 남자처럼 호칭했는데 이를 키리기리에게 또 걸리고 말았다. 결국 오오와다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남자답게 모든 것을 인정했다. 결국 오오와다는 진실을 고백한 뒤, 처형당했다. 이것이 오오와다의 최후였다.

 

2. 위에서 보다시피 오오와다와 후지사키 모두 큰 비밀을 품고 있었고 그 비밀은 자신의 정체성과 바로 직결되는 것이었다. 후지사키는 대놓고 성별이 비밀이고 오오와다도 폭주족을 이끄는 강한 리더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점이 바로 형의 죽음이니 이 비밀이 드러나는 것은 둘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모노쿠마의 동기를 받았을 때, 그 둘의 태도는 달랐다. 왜 그랬을까?

 

 기본적으로 후지사키가 자신이 사실 남자라는 것은 그가 가진 큰 비밀이었다. 하지만 후지사키는 그 비밀로 인해 더욱 큰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즉, 후지사키에게 자신이 사실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비밀은 후지사키가 궁극적으로는 극복해야 했던 벽이었다. 모노쿠마는 그 벽을 넘을 시기를 의도적으로 앞당긴 것뿐이었다. 그러나 오오와다는 달랐다. 그는 형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비밀로 하고 폭주족의 리더로 지냈다. 그 덕에 오오와다는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을 회피할 수 있었다. 즉, 후지사키의 비밀이 단순한 콤플렉스였다면 오오와다의 비밀은 과거의 죄였다. 그러므로 오오와다는 후지사키보다 훨씬 더 비밀 유지에 절박한 입장이었다. 만약 후지사키가 산 채로 그가 사실 남자였다는 게 모두에게 밝혀졌더라면 후지사키는 조금 많이 부끄러웠겠지만 그래도 후지사키는 원만하게 친구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오와다는 어떨까? 모두에게 경멸의 눈초리를 받지 않을까? 오오와다는 그것이 두려웠다. 그는 후지사키와 달리 무슨 수를 쓰더라도 비밀을 감춰야 했다.

 

 거기에 후지사키는 오오와다의 비밀을 전혀 모른 채 그에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으니 오오와다는 더욱더 궁지로 몰렸다. 사실 후지사키는 아무리 봐도 학원 안에서 가장 약자였다. 그런 약자조차 매우 치명적인 비밀을 풀 수 있는데 자신은 무엇인가, 자신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괴감, 자신과 달리 비밀을 고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후지사키를 향한 분노와 질투,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 것이라는 거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오오와다를 살인으로 이끌었다. 물론 살인을 저지른 뒤, 오오와다는 어느정도 정신을 차렸다. 그가 현장을 조작하고 후지사키를 여자로 보이게 한 것은 자신이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있지만 남자로서 후지사키의 비밀을 지켜주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뭐 하나, 이미 죽였는데. 사람을 죽인 시점에서 그를 변호할 수는 없다. 그는 그저 살인마다.

 

 후지사키의 경우는 많이 안타깝다. 오오와다가 조금만 참고 후지사키를 죽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오와다도 자신의 비밀을 털고 과거의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에서는 경멸의 눈초리를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며칠 전에 자신을 배신한 마이조노도 용서한 나에기라면 오오와다 정도는 쉽게 용서했을 것이다. 또, 후지사키가 오래 살았다면 그가 죽기 직전 만든 얼터 에고를 더욱 개량해 흑막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얼터 에고가 머신 러닝이 되는 인공 의식이라도 샘플이 부족한 상황에서 개발자의 생존은 얼터 에고의 성능 상승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후지사키의 죽음은 참으로 아쉽다.

 

3. 이렇게 둘의 소개를 대충 마쳐보았다. 사실 둘을 묶어서 소개한 것처럼 이 둘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후지사키는 자기 모습을 한 얼터 에고에게 비중이 밀리며 오오와다는 아예 별명이 버터다. 하지만 오오와다의 살인 동기는 감정적으로 일어난 우발 살인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보여주었고 후지사키는 일단 남자고 훗날 도움이 되는 얼터 에고를 남겼다. 그런 점에서 둘의 의미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단간론파의 2 챕터들 중에서 제일 완성도가 높은 2챕터가 바로 1편의 2챕터라 생각한다. 훗날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으면 말하겠지만 후속작들의 2챕터는 다른 챕터, 특히 1챕터에 밀리는 느낌이 강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이 둘도 나름 단간론파라는 게임에 일정 부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