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단간론파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에기, 여기까지 말하면 알 수 있겠지?
- 키리기리 쿄코, 초고교급 탐정
'초고교급 절망'을 돌파하겠다고 나선 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절망'과 맞서려고 한 넌... '초고교급 희망',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키리기리 쿄코, 초고교급 탐정
내가 자네한테 몇 번을 얘기했나. 불가능한 것을 전부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말이 되지 않더라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고.
- 셜록 홈즈, 영국의 명탐정
0. 일반적으로 추리물의 주인공은 보통 탐정이다. 물론, 많은 추리 소설에서 탐정의 조수가 그 작품의 시점을 맡는 역할은 흔하다. 마치, 셜록 홈즈 시리즈의 존 왓슨처럼 말이다. 그러나 결국 사건을 마지막에 해결하는 역할은 탐정이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그런 접근이 힘들다.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게임의 플레이어가 직접 개입하는 플롯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임이 다른 매체와 차별되는 것은 플레이어가 직접 조작하는 맛인데, 탐정이 다 해결해 주면 그런 맛이 싹 사라진다. 그러므로 게임에서는 탐정의 역할을 주인공이 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라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주인공인 나에기가 다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초고교급 탐정 역할을 하는 것은 히로인인 키리기리다.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탐정으로서 뭘 하길래 탐정 역할을 하는 걸까?
1. 키리기리 쿄코는 대대로 탐정 가문이었던 키리기리 가문이었다. 키리기리도 그녀의 조상들처럼 탐정이 되어 사건을 해결해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달랐다. 그녀의 아버지였던 키리기리 진은 딸을 버리고 키보가미네 학원의 학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키리기리는 자신의 아버지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에게 의절을 선언하기 위해 키보가미네 학원 입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키리기리도 살인게임에 휘말렸고 모노쿠마는 특별히 키리기리를 더 경계해서 그녀의 기억을 더 확실하게 없애버렸다.
살인게임이 시작한 직후, 다른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개할 때, 키리기리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흑막에게 경계받는다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좀 묻어가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살인이 발생하자 탐정의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앞에 나서서 나에기에게 온갖 힌트를 넘겨주었고 순식간에 일행의 브레인이 되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키리기리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을 제외하면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고 협조적인 나에기와 협조하며 살인게임의 비밀을 풀어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나에기에게 힌트를 주며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고 숨겨진 방의 위치도 알려줬다. 비록 나에기가 사쿠라가 내통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숨겼을 때는 배신감을 느끼며 그를 잠시 배척하기도 했지만 사쿠라의 비밀이 폭로된 뒤, 분위기가 개판이 되자 나에기의 배려심을 알고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키리기리는 조사 끝에 학원에 15명이 아니라 16명의 초고교급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16번째 초고교급이 바로 초고교급 절망, 이쿠사바 무쿠로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오오가미가 죽기 직전에 열었던 학원장실에서 마스터키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키리기리가 너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자 모노쿠마는 키리기리를 제거하기 위해 나에기를 손수 죽인 뒤, 이를 키리기리에게 덮어 씌우려 했다. 다행히 키리기리는 이를 간파해 나에기의 죽음을 맞지만 흑막은 또 다른 방법으로 이미 죽인 이쿠사바 무쿠로의 시체를 살인 사건처럼 꾸며 키리기리를 제거하려 했다.
마침 나머지 4명은 알리바이가 있는 상황에서 범인이 될 수 있는 것은 키리기리와 나에기 둘 뿐인 상황에서 키리기리는 쿨하게 마스터키의 정체를 숨기고 자신은 열쇠를 토가미에게 넘겼으므로 범인은 나에기라고 빠져나갔다. 원래라면 그다음에 나에기도 천천히 구해주려고 했던 키리기리였지만 모노쿠마의 농간으로 순식간에 재판이 끝나버리고 나에기가 진짜 죽게 생겼다. 다행히 삭제된 줄 알았던 얼터 에고가 나에기를 구해주는 데 성공했다. 재판이 끝나자마자 키리기리는 나에기가 떨어진 쓰레기장으로 향해 그를 구출해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키리기리와 나에기,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며 모노쿠마와 최후의 대결을 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밝혀진 진실은 참혹했다. 키리기리의 아버지는 사실 속으로는 키리기리를 사랑했으나 이미 에노시마 손에 죽어버렸다. 그리고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지키려 했던 세계는 이미 망해버렸다. 키리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듣고 잠시 절망했다. 하지만 각성한 나에기에게 일갈을 들은 키리기리는 아버지라면 이러지 않을 것이라며 절망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에노시마가 죽는 것을 본 뒤, 키리기리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며 학원에서 탈출했다.
2. 키리기리는 기본적으로 탐정이고 탐정의 목표는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다. 또, 여타 다른 창작물의 탐정처럼 단순히 취미나 유흥으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키리기리는 크던 작던 진실을 밝히면서 그 결과로 정의를 구현하고 세상을 조금 더 좋게 만들려는 의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키리기리가 선이고 이타적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하지만 반대로 키리기리는 이런 면모와 달리 이기적인 모습도 많이 보여준다. 대표적인 장면이라면 먼저 나에기에게 숨겨진 방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키리기리가 숨겨진 방을 알려준 이유는 단순한 정보 공유가 아니라 흑막이 숨겨진 방의 침입자에게 보이는 반응, 즉 나에기를 미끼로 쓴 것이었다. 실제로 나에기는 숨겨진 방에서 흑막에게 습격당했으며 겨우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또, 5번째 사건에서 키리기리가 범인으로 몰리자 그녀는 나만 아니면 돼 정신으로 거짓 알리바이를 만들어 나에기를 범인으로 몰았다. 실제로 얼터 에고가 아니었다면 나에기는 프레스기에 깔려 처참히 처형당했을 것이다. 이런 모습들은 키리기리를 마냥 좋은 캐릭터만으로는 보기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키리기리는 왜 이러는 걸까? 키리기리의 사고방식은 이러하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진실을 밝히려면 내가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진실을 위해 남이 희생되는 것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키리기리는 진실을 위해서는 자신이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타인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약간 왜곡된 사상을 갖고 있다. 이는 키리기리가 과거의 타인을 믿었다가 실패한 경험에서 왔다.
그리고 키리기리의 판단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나에기의 망상이긴 하지만 키리기리가 죽은 세계에서 나에기 일행은 진실은 포기한 채 그냥 학원에 알박고 산다. 그 토가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키리기리의 유무는 진실을 얻을 수 있냐 없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그러나 반대로 나에기가 없었다면 키리기리는 진실을 알았을지언정 그 진실에 절망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처형 중 얼터 에고가 난입해 나에기를 구해준다는 전개는 키리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으며 변수 없이 진행되었을 경우 키리기리는 무조건 패배했을 것이다.
이는 결국 진실 너머에 있는 승리와 탈출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키리기리와 나에기, 더 나아가 토가미나 오오가미 등 다른 학생들의 조력이 없이는 달성이 불가능했음을 시사한다. 결국 키리기리의 왜곡된 사상은 토가미의 사상처럼 틀렸고 둘 다 그 사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성장, 곧 진정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비록 성장통이 조금 크기는 했지만 키리기리는 분명 성장했다. 그리고 학원에서 탈출한 뒤, 그녀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마치 학원에서 탈출한 다른 학생, 특히 나에기처럼 말이다.
3. 냉정하게 말해서 키리기리는 단간론파 1편의 진 히로인이다. 제작진들은 진 히로인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건 다른 캐릭터, 특히 마이조노를 좋아하는 팬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굳이 제작진에서 다른 여캐들의 팬덤을 붕괴시킬 이유는 없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말했을 것이다. 솔직히 1 챕터만에 광탈한 캐릭터를 진히로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게임과는 사정이 많이 다르므로 일단 넘어가겠다.) 그리고 키리기리는 그 역할을 잘 해냈다. 비록 키리기리가 중반부에 약간 비호감짓을 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도 성장통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키리기리가 그냥 뛰어난 추리만 뽐내는 완벽한 캐릭터였으면 당장의 기분은 좋을지언정 캐릭터의 깊이는 더 얕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에 조금 더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로 키리기리가 잘 구축되었다 생각한다. 이를 끝으로 이번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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