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오루알사, 포켓몬 불가사의 던전 탐험대 시리즈,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 루비사파이어에서 레쿠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늘 기둥을 지키고 있던 전설의 포켓몬 1, 이것이 레쿠쟈였다. 그러나 에메랄드 발매 이후, 레쿠쟈의 위상은 달라졌다. 단순한 전설의 포켓몬 1에서 가이오가와 그란돈의 싸움을 중재한 더 위대환 포켓몬을 탈바꿈한 것이다. 그런 만큼 아무리 게임 프리크가 에메랄드만의 요소를 유기한다고 해도 레쿠쟈만큼은 유기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게임 프리크는 레쿠쟈만의 스토리를 만드려 했고 이를 위해 전작에서 성공한 핸섬하우스 에피소드를 본받아 오루알사에도 레쿠쟈만을 위한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이것이 에피소드 델타, 그리고 오루알사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다.
1. 에피소드 델타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새롭게 등장한 피아나라는 캐릭터가 주요 인물들의 키스톤을 훔치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피아나를 추적해 하늘 기둥까지 올라갔고 거기서 피아나가 레쿠쟈를 메가진화시켜 호연지방에 떨어지는 운석을 막으려 했다는 진실이 드러났다. 그러나 피아나의 예상과 달리 레쿠쟈는 메가진화하지 않았고 다행히 주인공 덕에 레쿠쟈는 메가진화에 성공해 운석과 운석에 타고 있던 테오키스를 막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줄거리에 무슨 문제점이 있었던 걸까?
그건 바로 피아나라는 캐릭터 그 자체다. 일단 피아나는 3세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캐릭터다. 당연히 근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캐릭터다. 그런 캐릭터가 에피소드 델타의 중심을 맡는다는 것부터가 거부감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피아나는 단순히 에피소드 델타의 중심이 되는 게 전부가 아니다. 피아나가 제대로 등장하는 건 에피소드 델타부터지만 그녀는 본편에서도 마그마단/아쿠아단 조무래기로 위장한 채 암약했다. 특히 마적과 아강에게 그란돈과 가이오가를 깨우라고 제안한 것도 피아나다. 그렇다, 오루알사에 처음 등장하는 캐릭터가 작품 전체의 흑막을 맡은 것이다.
이는 원작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작품의 전제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분명 오루알사에서 아강과 마적은 각각 포켓몬과 인류를 위에 할거한 호걸로 묘사되는데 여기에 피아나가 들어간 순간 흑막에게 속아 되지도 않을 짓을 저지른 허접한 빌런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는 에피소드 델타는 물론 오루알사의 전체적인 스토리도 망치는 원인이 되고 만다.
물론 피아나의 존재만이 문제인 건 아니다. 피아나의 행적도 문제가 심각하다. 일단 피아나의 포지션 자체는 주인공을 포함한 타인들은 모르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지자다. 문제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벌이는 짓 자체가 민폐라는 점이다. 먼저 피아나는 레쿠쟈를 깨우기 위해 아강이나 마적을 속여 가이오가나 그란돈을 깨우게 만들었다. 이는 레쿠쟈를 깨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문제라면 가이오가나 그란돈이 깨어나기만 해도 이미 호연지방은 멸망이 확정이 난다는 것이다. 분명 피아나는 운석으로 인한 호연지방의 멸망을 막는 게 목적인데 가이오가와 그란돈이 깨어나서 준비 운동 몇 번만 하면 이미 호연지방은 멸망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무슨 소용인가?
물론 피아나가 주인공이 가이오가나 그란돈을 막을 것이라고 알고 이를 도왔다면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나는 가이오가와 그란돈을 막는 데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며 그저 이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누가 보면 진짜 호연지방 멸망을 위해서 일을 꾸민 줄 알겠다.
거기다 피아나의 문제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운석을 막기 위해서는 메가레쿠쟈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키스톤 여러 개가 필요했다. 그래서 피아나는 네임드 트레이너의 키스톤을 훔쳤다. 여기까지는 나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문제라면 그 도중에 피아나는 이끼우주센터에 난입해 이차원 전송장치를 파괴했다. 그렇다! 메가레쿠쟈는 운석을 파괴할 유일한 수단이 아니었다. 무려 데봉코퍼레이션의 과학의 힘으로 만들어진 위대한 발명품, 이차원 전송장치로 운석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운석 걱정을 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아나는 이를 무시하고 이차원 전송장치를 파괴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차원 전송장치로 빠져나간 운석이 평행세계의 호연지방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이를 주장하며 한 말이 그 유명한 "상상력이 부족해."다. 사실 평행세계가 실제로 존재할 수는 있고 실제로 존재한다면 피아나의 논리 자체는 이상한 게 아니다. 자기 차원만 좋자고 다른 차원에 폐기물을 보내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는 않다. 문제라면 평행세계가 존재한다는 근거가 상상력뿐이라는 거다. 피아나는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고작 상상력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이차원 전송장치를 파괴했다. 이는 게임 내의 캐릭터에게도, 게임 밖의 플레이어에게도 매우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고작 상상력으로 모두를 설득할 수 있었으면 세상에 싸움이나 전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괴벨스조차 상상력이라는 근거만으로는 선동을 하지 못할 텐데 상상력이라니, 정말 끔찍한 근거다.
뭐, 이차원 전송장치가 박살이 나도 피아나의 계획이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메가레쿠쟈가 운석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차원 전송장치 따위는 머릿속에서 잊힐게 뻔할 뻔자였다. 그러나 피아나의 계획은 실패했다. 기껏 키스톤을 받은 레쿠쟈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레쿠쟈가 메가진화를 하지 않는다는 상상력이 부족했던 피아나는 당황만 한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것이 선지잔가? 아무리 봐도 피아나는 선지자보다는 거짓 선지자, 묵시록의 두 번째 짐승 같다. 이런 피아나의 계획은 놀랍게도 주인공이 우연히 주운 운석으로 달성되니 피아나의 존재는 아무리 봐도 쓸모가 없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이런 피아나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피아나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선지자의 역할이다. 이는 애니메이션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의 아케미 호무라처럼 스토리의 중심이 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이고 이 역할의 완성도의 따라 작품의 완성도도 바뀌는 법이다. 그리고 포켓몬은 놀랍게도 완벽한 선지자 캐릭터를 구현한 적이 있다. 물론 오오모리의 손에서 탄생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포켓몬 불가사의 던전 탐험대 시리즈에서도 피아나같은 선지자 캐릭터가 등장하니 바로 나무돌이다. 그리고 나무돌이는 피아나와 정반대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그렇다면 왜 나무돌이가 엄청난 호평을 받았는가? 그건 바로 피아나와 정반대였가 때문이다. 일단 나무돌이도 시간의 톱니바퀴를 훔치는 등 민폐를 저지르기는 한다. 그러나 작중에서 나무돌이가 시간의 톱니바퀴를 안 훔쳤더라도 시간이 멈췄을 것이라며 나무돌이를 옹호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굳이 가이오가나 그란돈을 깨울 필요가 없었던 피아나와 매우 대조된다. 또, 탐험대에서 나무돌이의 톱니바퀴 도둑질을 제외하면 사건을 해결할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야느와르몽에게 속은 주인공 일행이 시간의 톱니바퀴를 돌려놓아도 시간이 멈춘다는 것을 보여주며 나무돌이의 방법이 옳았음을 보여줬다.
또 피아나는 평행세계가 존재하는 이유로 상상력 밖에 제시하지 못했지만 나무돌이는 이대로 손을 놓으면 세계가 멸망하는 이유를 이미 망해버린 미래 세계를 여러 챕터에 걸쳐 탐험하면서 확실하게 보여줬다. 그리고 피아나는 모든 사건이 해결된 뒤, 멀뚱멀뚱거리다 사라지지만 나무돌이는 계획을 방해하려는 야느와르몽과 함께 동귀어진하며 스스로 희생하기까지 하는 차원이 다른 임팩트를 보여준다. 나무돌이는 여러 방면에서 피아나와 정반대였고 그렇기에 성공한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이러니 에피소드 델타가 답이 없는 거다.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캐릭터가 이 모양이니 어떻게 스토리가 호 평 받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에피소드 델타와 피아나, 그리고 이를 만든 오오모리의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오루알사가 명작으로 남지 못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만약 에피소드 델타를 조금만 상식적으로만 만들었다면 분명 오루알사는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오모리의 스토리텔링 실력은 그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그 결과 오루알사는 명작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오오모리의 처참한 스토리텔링 실력은 그다음 작품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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