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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흐릿한 추억 속에서 진실을 찾으며 - (3)

삶은계-란 2023. 5. 24. 23:07

※ 이 글에는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하골소실을 마지막으로 4세대가 끝나고 새로운 세대, 5세대가 시작되었다. 5세대는 다른 기존 세대와는 차별점이 있었는데 바로 기반 콘솔이 바뀌지 않은 채 발생한 최초의 세대교체였다는 점이었다. 1세대에서 2세대로의 세대교체조차 게임보이 컬러의 추가라는 나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고 포켓몬스터 크리스탈은 아예 게임보이 컬러 전용이었다. 그러나 5세대는 그런 변화조차 없는 최초의 세대교체였다. 그래서 다른 세대와 달리 그래픽의 발전이라는 자연스러운 혁신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5세대는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방향의 혁신을 들고 나왔다. 그것이 바로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다. 

 

 당시 블랙·화이트는 혁신 그 자체였다. 물론 게임의 전체적인 시스템은 그렇게 많이 바뀌진 않았지만 시스템을 제외한 중요한 요소들, 포켓몬, 그래픽, 분위기, 캐릭터, 스토리 등은 완벽히 바뀌었다. 특히 엔딩 전까지는 기존에 봤던 포켓몬 대신, 5세대에서 추가된 포켓몬만 봐야 했던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렇다, 블랙·화이트에서는 엔딩 전까지 포켓몬의 마스코트 피카츄, 동굴 친구 주뱃, 바다 친구 왕눈해, 이 모두를 볼 수 없었다. 이는 과거에도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포켓몬 최신작에서 피카츄가 없는 게 말이 될까? 블랙·화이트에서는 말이 됐다.

 

 이런 엄청난 혁신은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를 명작으로 칭송받게 했으면 블랙·화이트는 당당히 명작들 사이에 껴 만신전에 안치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블랙·화이트는 그 정도의 작품이었을까? 블랙·화이트는 만신전에 안치될 가치가 있을까? 이제부터 차근차근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다.

 

2. 블화에서 가장 큰 혁신은 역시 포켓몬이다. 블화에서는 156마리라는 1세대를 포함하더라도 가장 많은 수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1세대의 관동도감과 달리 5세대의 하나도감은 꽤 성공적인 타입 밸런스를 자랑한다. 가장 적은 타입인 얼음 타입과 독 타입이 7종이며 가장 많은 풀 타입이 20종이다.(페어리 타입은 당시에 없었으므로 제외한다.) 이는 관동도감에서 가장 적은 타입인 고스트와 드래곤 타입이 겨우 3종이고 가장 많은 독 타입이 33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잘 맞는 밸런스다.(마찬가지로 당시에 없었던 악, 강철 타입은 제외했다.)

 

 그러나 밸런스와 별개로 5세대 포켓몬의 디자인은 호불호가 갈렸다. 5세대는 특히 서양권을 노린 디자인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포켓몬 디자인이야 개인의 취향이므로 이를 더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원숭이 삼 형제(야나키, 바오키, 앗차키)랑 복붙로스(볼트로스, 토네로스, 랜드로스)는 좀 너무했다. 그냥 이 친구들은 디자인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서 그냥 성의가 없다. 이런 디자인은 앞으로 도 좀 지양했으면 좋겠다. 

 

 포켓몬 이야기는 이걸로 그만하고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자. 사실 5세대까지만 하더라도 2세대를 기반한 작품을 제외하면 레벨 디자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자면 레벨 디자인에서 독보적인 발전을 이룬 작품도 크게 없었다. 블화도 마찬가지였다. 레벨 디자인은 분명 뛰어난 편이지만 특출 나다고 하기는 부족하다. 그리고 새로운 포켓몬들은 신선했지만 호불호가 갈렸다. 마지막으로 콘텐츠 측면에서도 블화는 기존의 PT나 하골소실과 비교하면 부족했다. 특히, 포켓몬 뮤지컬은 솔직히 별로였다. 기존의 콘테스트의 열화판 그 자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도대체가 왜 명작이라 불리는 걸까?

 

3. 결국 블화의 평가를 좌우하는 것은 스토리다. 블화가 지금까지도 불멸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건 포켓몬에서 블화만이 있던 바로 특유의 스토리 때문이었다. 사실 4세대까지 포켓몬 스토리를 솔직히 별로라고 하기에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하기에도 그랬다. 포켓몬의 스토리는 마리오의 스토리와 비슷했다. 그냥 있기만 할 뿐, 평가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그런 거였다. 그러나 블화, 더 나아가 블화 이후의 게임에서 스토리는 평가의 매우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면 블화 스토리가 뭐가 어쨌길래 이렇게 고평가 받았던 걸까?

 

 나중에 블화 스토리를 조금 더 심층적으로 분석할 기회가 있을 것이므로 지금은 간단히 설명하겠다. 블화의 스토리는 단순히 기존처럼 여행을 떠나다 악의 조직을 물리치고 챔피언이 되는 그런 종류의 스토리가 아니다. 악의 조직, 플라즈마단의 수장 N은 자신의 손으로 챔피언 노간주를 쓰러뜨리며 그의 목표는 단순한 세계 정복이 아니라 포켓몬의 해방이다. N과 주인공은 각각 하나지방의 전설의 포켓몬(버전에 따라 다르다.)에게 선택받은 영웅이 되며 둘은 포켓몬 리그에서 운명적인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주인공은 N에게 승리하고 하나지방을 구원한다. 전형적인 포켓몬 스토리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블화에서도 고전적인 포켓몬 빌런 게치스가 흑막으로 등장하고 진정한 최종전은 게치스와의 대결이긴 하다. 그러나 N과 주인공의 대립은 스토리 내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

 

 이 스토리를 호평하는 쪽에서는 '서로 다른 사상의 이해'라는 주제를 잘 살렸다고 말한다. 반대로 비평하는 쪽에서는 결국 게치스의 등장으로 대결이 흐지부지되었으며 포켓몬의 해방이라는 소주제가 붕 떴다고 지적한다. 두 의견 모두 맞는 말이다. 주인공과 N의 대결은 각각의 인상과 진실을 건 결투였고 그 결투 끝에 서로 다른 사상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음을 잘 보여줬다. 그러나 결국 N은 게치스의 장기말이었고 게치스를 물리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난다는 것은 약간 허무하다. 그런 점에서 양쪽의 주장은 분명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호불호가 갈리는 스토리라면 블화는 도대체 왜 명작이라는 걸까?

 

4.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다. 블화의 핵심은 사실 스토리가 아니라는 거다. 아니 위에서 스토리가 블화의 핵심이라면서 그러면 뭐가 핵심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블화에는 스토리를 좋아했던 사람은 물론,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조차 사로잡았던 무언가가 있다. 바로 분위기다. 개인적으로 블화가 성공했던 가장 큰 이유는 블화만의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블화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독특하다. 다른 포켓몬 게임들은 대부분 특유의 밝고 희망찬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블화의 세계관은 상대적으로 어둡다. 물론 상대적이기 때문에 당대는 물론 후대의 진짜 어두운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블화는 계속 진지했고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다른 포켓몬 게임들은 아무리 후반부가 어두워도 초중반은 왁자지껄 희망찬 모험이 주가 되는 데 블화는 N이 초반부터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진지하게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엔딩에도 나타난다. 대부분의 포켓몬 게임의 엔딩 테마는 밝고 희망찬 분위기를 유지하지만 블화의 엔딩 테마는 유일하게 웅장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이는 블화의 후속작인 블화 2와도 대조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_mfCbJ4c 

블화 엔딩은 영웅이 되어 세계를 구했다는 느낌이라면

https://www.youtube.com/watch?v=Zqe5UAEGnLM 

블화 2 엔딩은 모든 여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런 독특한 분위기가 블화를 다른 포켓몬 게임과 차별점이 되어 블화의 스토리를 사람들 머릿속에 더 기억 남게 하지 않았나라 생각한다. 그래서 맨 처음에 했던 질문, 블화는 과연 명작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은 이거다. 블화는 명작이 맞다. 그러나 그것은 블화의 스토리가 아니라 분위기에 있다. 이게 이번 글의 결론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그 이후, 블화를 제대로 계승한 게임이 없다는 점이다. 블화 2는 분명 내용상으로는 블화의 후속작이지만 블화 2의 분위기는 블화보다는 기존의 후속작 게임과 더 닮았다. 그리고 블화 2 이후의 게임의 분위기도 유쾌한 모험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며 내용면에서도 블화보다 부족한 점이 많았다. 비록 레전드 아르세우스와 스칼렛·바이올렛에서 스토리가 발전하긴 했지만 분위기 측면에서는 블화와는 차이가 크다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블화의 분위기를 계승한 후속작이 언젠가는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