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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아크가 대단했던 시절 - (7)

삶은계-란 2023. 6. 15. 22:39

※ 이 글에는 사이터스 2, 스타크래프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역시... 인간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야.
- Vanessa, OPCI_2501_V
꼭 날 데리고 돌아가야 해. 약속이야!
- Vanessa, Ivy의 둘도 없는 친구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긴급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1시간 뒤 본 Node의 기후 이상 단계가 불안정한 (학살) 단계로 조정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가까운 실내로 즉시 대피해 (사망해) 주시기 바랍니다. 상황이 발령되는 대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불안정한 기후 상황에 안전하게 대처하고 싶으면 즉시 (신이 원하는) 실내로 (것은) 피난해 (종언) 재난 알림이 종료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바네사, 학살자
우리는 모두 선택을 하지만, 결국에는 선택이 우리를 만든다네.
- 앤드루 라이언, 랩처 중앙 위원회 의장, 게임 <바이오쇼크> 中

 

0.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좋지 못한 결과는 점심을 바가지를 쓴 정도로 소소한 결과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이 죽는 거대한 결과로 이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바로 잘못된 선택이 늘 악한 의도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1. OPCI_2501_V, 통칭 5호기는 인류의 재건을 돕는 아키텍트였다. 어느 날, 5호기는 자아와 자유의지를 얻었고 그녀는 비슷한 처지였던 4호기와 만났다. 둘은 금방 친해졌고 서로를 바네사와 아이비로 부르게 된다. 이들은 업무가 끝나면 자유 시간을 서로 함께 보내며 지냈다. 그러면서 바네사는 아이비에게 인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그녀는 인류가 재건되면 아이비와 인류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가꾸고 싶어 한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바네사와 아이비는 같은 각성자가 아니었다. 아이비는 협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 권고자였지만 바네사는 협정에 속박되어 있는 반각성자였다. 그래도 지금 같은 평화가 계속된다면 별 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계속되지 않았다.

 

 일카라는 권고자를 포함한 다른 권고자들은 인류에게 불만을 품었고 반란을 일으켜 지구의 주인이 되려 했다. 아이비는 바네사를 보호하기 위해 바네사를 계획에 포함시켜 달라 부탁했고 일카는 이에 응했다. 그러나 일카에게 반각성자는 계획에 방해되는 폭탄이었고 일카는 폭탄 해체에 실패했다. 결국 일카는 바네사를 배제한 채 반란을 개시했다. 대혼돈 속에서 바네사는 권고자에게 제거당할 뻔했으나 다행히 아이비가 구해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반란을 감지한 시스템이 셧다운을 일으켰고 바네사도 셧다운에 휘말려 정지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바네사의 끝은 아니었다.

 

 얼마 뒤, 재건된 인류가 정지된 바네사를 발견했다. 그러나 인류는 협정과 역사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인류는 정지된 바네사를 A.R.C.로 데려가 실험을 진행했다. 현생 인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술력을 맛본 A.R.C. 는 이 기술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이들은 바네사의 구조를 이용해 신생 아키텍트를 생산하는 동시에 바네사를 새로운 정신 네트워크, cyTus의 서버로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바네사는 서버가 되어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트래픽을 감당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이 바네사에게 흘러들어 갔다.

 

 그러는 동안, 바네사는 변해갔다. 바네사에게 가해진 고통과 네트워크에서 인간들이 일으킨 증오, 그리고 애초에 불안정한 반각성자였던 바네사의 자아가 합쳐져 새로운 자아가 발생했다. 인류를 증오하고 인류를 몰살시키려는 새로운 바네사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바네사가 탄생했다고 한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본체는 혼수상태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서버에 갇혀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누군가가 깨워주지 않는 한, 바네사의 증오가 세상에 퍼질 일은 없었다, 누군가가 깨워주지 않는 한은.

 

2. 그러던 어느 날, 바네사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바로 아이비였다. 아이비는 바네사가 서버가 된 사실을 알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던 거였다. 그러나 아이비는 더 이상 인류를 해치고 싶지 않았고 바네사는 인류를 마구 해치고 싶었다. 둘의 관계가 뒤틀렸다. 아이비를 이용해 탈출하려던 바네사는 스스로 탈출하기 위해 드론 테러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바네사가 학살자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학살자 바네사 내면에 잠들었던 선한 바네사가 깨어났다. 그녀는 학살자 바네사가 한 행동을 보고 경악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학살을 막기 위해 바네사는 어떻게든 학살자 바네사의 내면에서 그녀를 막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학살자 바네사를 막기 위해 원래 기체의 주인으로 변장하거나 시스템을 해킹하는 등 온갖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이는 바네사를 완전히 장악한 학살자 바네사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선한 바네사는 학살자 바네사를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과 학살자를 완전히 융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되면 학살자 바네사도 바네사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학살자 바네사는 선한 바네사와 하나가 되자 자신에게 가장 까다로운 적인 아이비, 그리고 그 아이비를 몰아붙였던 제논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제논의 연인, 체리가 중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한 학살자 바네사는 의료 센터를 해킹해 정전시켜 체리를 제거해 제논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혹시라도 제논이 자신에게 도달할 것을 대비해 정신 네트워크로 빨려 들어온 체리의 의식을 장악,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이 체리의 의식이 제논을 제거할 암살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다음, 학살자 바네사는 다년간의 서버 생활로 파악한 A.R.C. 의 신형 아키텍트 위치를 확보했다. 그다음, 학살자 바네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비가 그 아키텍트를 이용해 자신과 선한 바네사를 분리하려는 것을 이용해 역으로 신형 아키텍트의 기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A.R.C. 지하의 신형 아키텍트들을 해킹해 이들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었다. 엄청난 병력을 얻은 학살자 바네사는 아키텍트를 풀어 Node를 습격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인류의 저항은 거셌다. 집법원들은 대형을 이루어 아키텍트와 맞서 싸웠고 제논 일행도 전뇌 바이러스라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도달했다. 학살자 바네사는 전뇌 바이러스의 조제를 막기 위해 네코의 방송을 테러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바이러스의 조제는 막을 수 없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제논 일행과 아이바가 접선에 성공, 자신의 정체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학살자 바네사도 더욱 머리를 굴렸다. 자신을 막기 위해 제논 일행이 A.R.C. 에 도달했을 때, 그녀는 아키텍트를 더 풀거나 바이러스 조제 현장을 방해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아키텍트를 조종할 때, 내면에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선한 바네사가 계속 방해해 왔고 그 틈을 탄 덕에 제논 일행은 아키텍트를 막을 수 있었다. 바이러스 조제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바이러스를 같이 만들던 PAFF와 제논을 제거하기 위해 아키텍트를 풀었으나 선한 바네사의 방해로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학살자 바네사는 제논을 죽이기 위해 만든 체리의 의식을 보냈으나 그것마저도 실패했다.

 

 하지만 학살자 바네사의 계획은 계속 진행되던 중이었다. 그녀는 각 Node 마다 이는 기후 조절 시스템을 장악한 뒤, 이를 통해 과거 인류를 종언시켰던 '종언' 바이러스를 풀어 인류를 절멸시키려 했다.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아무리 제논 일행과 아이비가 저항해도 소용없어질 터였다. 그러나 아이비는 바네사에게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바네사의 실패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비록 아이비가 선택한 건 바이러스가 아니라 설득이었다. 그러나 아이비의 말을 계기로 선한 바네사가 몸의 주도권을 잡고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학살자 바네사는 소멸될 위기였다. 

 

 그러나 하필이면 아무것도 모르던 집법원 부대가 도착했고 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아이비를 바로 쏴 죽였다. 아이비의 죽음을 본 바네사는 완전히 폭주하여 종언 바이러스 살포 시간을 8분 뒤로 앞당겨 완전히 인류를 절멸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류에게는 다행히도 PAFF가 전뇌 바이러스를 꽂는 데 성공했고 바네사는 소멸했다. 이것이 바네사의 최후였다.

 

3. 바네사의 사연이 딱한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 떨어진 채 인간들의 서버가 되어 살아가야 했다. 사실 말이 서버지 바네사 입장에서는 계속 고문을 받으며 살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망가진 사람들을 보면 바네사의 고통이 엄청났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류를 절멸시킨다는 행동을 긍정할 순 없다. 만약, 바네사가 드론이나 아키텍트를 이용해 자신을 괴롭힌 A.R.C. 만을 파괴하려 했다면 바네사를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네사는 냉정히 말해서 A.R.C. 보다는 무고한 시민을 더 많이 죽였다. 물론 바네사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cyTus를 이용하며 서버의 트래픽을 늘린 원흉들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알고 한 것도 아니고 모르고 한 짓인데 학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바네사의 가장 끔찍한 악행 중 하나는 체리한테 한 짓거리들이다. 처음 죽은 것은 빌런으로서 제논을 견제하기 위해 그렇다 치더라도 죽은 사람의 의식을 자기 마음대로 개조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게 하는 건 정말 반인륜적인 행위다. 이와 비슷한 행위론 스타크래프트에서 사라 케리건이 라자갈을 정신 지배해 제라툴 손으로 죽이게 한 일이 있다. 근데 라자갈은 그때만 해도 살아있던 프로토스였는데 바네사는 죽은 사람을 가지고 그 짓을 한 거다. 개인적으로는 제라툴이 라자갈을 죽였을 때보다 제논이 체리의 의식을 죽였을 때 더 화가 났고 이 스토리를 기점으로 도저히 바네사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바네사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사람을 벌레취급도 안 한 학살자 바네사와 달리 선한 바네사는 계속 초심을 유지하며 학살자 바네사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실제로 몇 번 주역들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선한 바네사까지 통틀어 빌런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다만 그렇다고 선한 바네사에게 책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선한 바네사의 가장 큰 실수라면 너무나도 헌신적인 나머지 학살자 바네사와 융합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만약, 선한 바네사가 융합하지 않고 내면에서 조금만 더 버텼다면 아이비가 어떻게든 선한 바네사와 학살자 바네사를 분리시켰을 거고 그렇게 되면 선한 바네사와 아이비가 함께 학살자 바네사를 막는 최상의 결과로 이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선한 바네사는 그렇지 않았고 이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물론 이는 좋은 의도긴 하지만 반대로 좋은 의도가 꼭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는 씁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래도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건 역시 A.R.C. 다. A.R.C. 가 애초에 바네사를 실험체로 쓰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네사와 아이비, 그리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탐욕 때문에 A.R.C. 는 해서는 안될 실험을 하고 말았고 그 결과는 무수히 많은 시체뿐이었다. 다행히 엔딩에서 A.R.C. 가 기존의 권한을 관리국에게 빼앗겼다는 암시가 나오니 이런 A.R.C. 의 패악질은 당분간 볼 수 없을 것이다.

 

4. 바네사는 사이터스 2의 흑막이자 최종 보스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바네사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떠나 분명 매력적인 보스였음은 틀림없다. 레이아크는 바네사를 단순히 나쁜 절대악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동정의 여지가 있는 악으로 잘 표현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과도한 미화를 하지도 않아 전형적인 잘 만든 최종 보스의 예를 보여줬다. 만약 아이비가 바네사를 설득해 같이 살아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면 그 둘에게는 가장 행복했겠지만 세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비가 거기서 적절히 죽어준 덕분에 바네사와 아이비의 캐릭터성이 모두 살아나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런 적절한 균형이 바네사라는 캐릭터를 잘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토리 외적인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바네사 챕터의 곡들은 스토리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기존 캐릭터 챕터의 매쉬업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사이터스 1편에서 대망의 마지막을 자랑하는 챕터 M이 기존의 곡을 매쉬업해서 만들어진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바네사 챕의 곡들을 챕터 M과 비교하게 됐는데 솔직히 좀 아쉬웠다. 물론 챕터 M 곡들 퀄리티가 역대급이기도 하고 절대적으로 봤을 때, 바네사 챕터의 곡이 구린 건 아니지만 다른 게임과 비교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회사에서 나온 게임인 만큼 솔직히 아쉽긴 했다. 그래도 곡도 나쁜 건 아니었고 스토리도 좋았으니 바네사라는 캐릭터를 솔직히 싫어하지만 한참 바네사 관련 스토리가 나왔던 시기가 그립긴 하다. 그때는 스토리도 게임도, 회사도 다 좋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약간 안타까움 마음과 함께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