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와 포켓몬 불가사의 던전 마그나 게이트와 무한대의 미궁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지난 글에서는 N과 주인공을 통해 포켓몬스터 블랙·화이트 스토리의 강점을 소개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블랙·화이트의 스토리에는 분명 허점이 있다. 그리고 그 허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블랙·화이트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주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블랙·화이트의 대주제는 분명 서로 다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주제라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어른들도 추상적인 주제를 지닌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포켓몬의 주 타겟층은 분명 어린아이 들이다. 그런 만큼, 쉽게 블랙·화이트의 대주제를 전달할 수 있는 소주제가 블랙·화이트에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이 N이 주장하는 포켓몬의 해방이다. 포켓몬의 해방 자체는 한 번쯤 많은 팬들이 생각하던 소재기 때문에 사람들이 N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대주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주제가 문제가 되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포켓몬이라는 컨텐츠 자체가 동물학대의 여지가 있다. 꼭 로켓단까지 가지 않더라도 서로 포켓몬을 키워 그들을 싸움에 내모는 행위, 소위 Blood Sport를 현실에서는 동물 학대라 부른다. 투견이 그렇고, 투계가 그렇다. 현실의 동물보호단체는 이런 Blood Sport를 꾸준히 동물 학대로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포켓몬을 처음 만든 제작진들도 의식하던 주제였다.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슈도 타케시는 이를 의식해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의 완결 편을 포켓몬의 반란, 그리고 지우 일행과 로켓단 삼인방이 이를 대화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리려 했다. 비록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의 인기로 완결 편은 취소되었지만 이는 포켓몬스터가 동물 학대와는 충분히 연관이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단순히 포켓몬은 게임이기 때문인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포켓몬의 세계관이 너무나도 밝고 희망찬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도 알까기로 포켓몬을 유기하는 플레이어는 많았지만 이때는 이를 단순한 밈으로만 여겼지 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치, 유희왕에서 주먹이 아니라 듀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포켓몬스터라는 프랜차이즈에 존재하는 일종의 절대적 규칙이었다.
그러나 제작진이 N의 입을 빌려 그 소주제를 수면 밖으로 꺼내며, 그 절대적 규칙은 깨졌다. 몬스터볼로 포켓몬을 포획하고 포켓몬 배틀을 하는 것은 학대의 소지가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한 번 그 문제를 꺼낸 이상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포켓몬 세계에서는 이것은 학대가 아니다라든가 아니면 지금의 모순을 해결할 방법을 주인공이 제시하든가 말이다. 물론, 그 문제를 해결하기는 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블랙·화이트가 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방법이었다.
2. 블랙·화이트의 대주제는 서로 다른 사상의 이해다. 이 뜻은 적어도 블랙·화이트에는 절대악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는 절대악이 존재한다. 그러나 적어도 블랙·화이트의 세계에서 정의의 반대말은 또 다른 정의지 악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블랙·화이트는 소주제와 프랜차이즈의 모순을 절대악의 등장으로 해결했다. 이것이 블랙·화이트 스토리의 가장 큰 결점이다.
게치스, 그는 포켓몬스터 역사상 최악의 빌런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캐릭터다. 그는 N을 가스라이팅해 왜곡된 사상을 심어준 다음, 그를 이용해 하나지방을 정복하려 했다. 이런 캐릭터는 보통 비판의 대상이 될지언정 비평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게치스는 블랙·화이트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빌런이었다. 만약 그가 DPPT나 XY의 빌런이었다면 그는 비평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극도로 높여주는 잘 만든 빌런으로 호평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게치스는 블랙·화이트의 빌런이다. 그리고 그게 문제다.
블랙·화이트는 게치스로 스토리의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을 모조리 해결하려는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여준다. 인간에게 학대당하는 포켓몬? 게치스가 가스라이팅 했다. N이 포켓몬 해방이라는 이상을 품은 이유? 게치스가 가스라이팅 했다. 플라즈마단의 진실? 게치스가 흑막이었다. 서로 다른 사상의 이해라는 작품의 대주제마저 게치스를 함께 이긴다는 참으로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넘어간다. 심지어 완전한 이상을 품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범죄조직의 보스였던 N의 처벌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왜? 사실 나쁜 건 순전히 게치스였으니까.
결국 포켓몬의 해방이라는 소주제와 서로 다른 사상의 이해라는 대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블랙·화이트는 너무나도 쉽고 간편한 절대악에게 모든 것을 떠넘긴다는 지름길을 선택했고 그 결과 블랙·화이트의 대주제는 무너졌다. 만약 서로 다른 사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면 왜 게치스는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게 블랙·화이트의 모순을 드러내는 적나라한 현실이다.
이런 비슷한 주제를 더 효과적으로 전달한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포켓몬 불가사의 던전 마그나 게이트와 무한대의 미궁(이하: 마그나 게이트)이다. 비록 한글로는 나오지 못했고 작품의 전체적인 평가 자체도 아쉬운 평을 받긴 하지만 적어도 스토리만큼은 마그나 게이트가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마그나 게이트도 비슷하게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 대주제인 주제에 빙촉체라는 절대악이 등장한다. 그러나 게치스와 달리 빙촉체는 포켓몬들의 부정적인 감정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이므로 그냥 나빠서 모든 일의 흑막이 된 게치스보다는 설득력이 있으며 빙촉체를 무찌르며 서로를 이해해 나가는 포켓몬들의 묘사도 더 뛰어났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블랙·화이트의 스토리에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3. 그러므로 블랙·화이트 스토리의 평가를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인물과 사상 간의 대조와 대립을 통해 서로 다른 사상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훌륭히 전달했고 이에 뒤따르는 블랙·화이트 특유의 분위기도 뛰어났다. 다만, 후반부에 게치스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는 전개가 대주제와는 모순이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스토리를 불멸의 명작이라고 칭하기는 부족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래도 냉정히 말해서 이 정도면 포켓몬스터 스토리 중 상위권의 스토리다. 블랙·화이트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블랙·화이트 만한 작품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 레알세나 스칼렛·바이올렛에서 획기적인 개선을 통해 스토리가 거하게 발전해 거의 없었다는 거지 사실 한참 오오모리의 폼이 파멸적일 때만 하더라도 블랙·화이트와 N이 그립다고 울부짖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블랙·화이트는 최초로 포켓몬이 이런 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만약 이런 스토리의 혁신이 이후에도 계속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블랙·화이트는 더 고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솔직히 그 혁신의 계승이 최근에야 시작되었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쉽다. 그래도 이제는 포켓몬 스토리도 많이 좋아졌으니 블랙·화이트에서 시작된 스토리 혁신이 계속되어서 몇 년 뒤에는, 포켓몬이 그때는 상상도 못 했을 스토리 명가라는 칭호를 얻기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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