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슈퍼 단간론파, 라오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기, 잠깐 들어줄래? 그게, 슬퍼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이건 지금까지와는 다른걸.
모두는 지금처럼 "누군가를 의심해" 살아남는 게 아냐. 모두는 "나를 믿고" 살아남는 거야.
- 나나미 치아키, 초고교급 게이머
너희들은 게임 같은 게 아니잖아. 게임인 것은 나뿐... 너희들은 그렇지 않잖아...
- 나나미 치아키, 초고교급 게이머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 성경, 마태복음 5장 39절
0. 전 세계 게이머들이 갖는 낭만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우자가 자신의 취미 때문에 잔소리하는 일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 쉬는 시간에 배우자와 함께 게임을 하면서 지낼 수도 있는 등 너무나도 편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배우자를 찾는 것은 어렵다. 일단 여자가 남자보다 게임을 덜 하는 경향도 있고 설사 게임을 하는 여자와 남자가 만나더라도 서로 하는 게임이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동물의 숲을 좋아하는 여자와 리그 오브 레전드를 좋아하는 남자가 가진 공통점이라곤 게임을 한다는 것 외에는 없다. 차라리, 넷플릭스로 아케인을 즐겨본 여자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그런 만큼 초고교급 게이머인 나나미 치아키는 처음 볼 때부터 호감일 수밖에 없다. 게임도 가리지 않고 잘하고, 예쁘고, 성격도 착한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1. 나나미 치아키는 위에서 말했던 대로 초고교급 게이머다. 말 그대로 모든 게임에 능숙하며 모든 게임에 박학하다. 그래서 그런지 살인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캐릭터기도 하다. 추리 게임을 해본 짬이 있어서인지 증거 수집이나 추리에서 능숙한 모습을 보이며 주인공인 히나타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파헤쳤다. 하지만 나나미는 단순한 초고교급 게이머가 아니라 살인 수학여행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캐릭터였다.
사실 히나타를 비롯한 15명, 키보가미네의 77기 학생들은 전부 에노시마와 협력해 세계를 멸망시키는 걸 도운 초고교급 절망들이었다. 현실로 따지면 나치 전범들인데, 이들은 첫 번째 살인 게임이 에노시마의 죽음으로 끝난 뒤, 나에기 일행이 들어간 미래기관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에노시마도 용서하려 한 나에기는 당연히 이들도 충분히 갱생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어서 에노시마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때와 달리, 나에기는 이번에는 철저한 준비를 통해 77기를 갱생시킬 계획을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신세계 프로그램이었다. 신세계 프로그램은 초고교급 절망의 갱생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으로 남쪽 섬을 가상에서 구축한 뒤, 77기의 뇌를 아직 멀쩡했던 키보가미네 입학 전으로 되돌린 다음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이들을 새롭게 갱생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에 나에기 일행이 직접 참가하는 것은 위험하고 불안정하다고 판단해 프로그램 내에서 77기를 도울 Ai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하나는 신세계 프로그램에서 교사 역할을 맡을 우사미라는 토끼 Ai,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학생으로서 모두를 도울 나나미 치아키였다. 이 둘이 있었으니 신세계 프로그램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모두를 성공적으로 갱생시킨다가 나에기의 계획이었다.
물론 계획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일은 없는 법이다. 프로그램에 모노쿠마가 난입한 바람에 우사미는 모노미가 되어버렸고 갑자기 살인 수학여행이 시작되었다. 나나미는 그 상황 속에서 바로 진실을 말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나미는 이들을 갱생시키기 위한 Ai이므로 갱생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진실 고백은 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나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히나타를 도와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것뿐이었고 이는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4개의 사건이 해결된 뒤, 진실을 파악한 또 다른 자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코마에다였다. 본색을 드러낸 이후부터 나나미와 대립해 왔던 코마에다는 사실 나나미를 제외한 나머지가 전부 절망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나나미를 자신으로 죽인 범인으로 만들어 그녀를 제외한 전부를 죽이려 했다. 코마에다는 폭탄으로 모두를 위협하며 배신자는 자신의 정체를 자백하라고 협박하는 동시에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상황 속에서 코마에다의 말에 따르면 배신자였던 나나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인간이 날고 싶다고 날지 못하는 것처럼 나나미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역시나 코마에다를 찾아 헤매는 것뿐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나나미는 코마에다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판이 시작되자 나나미는 다시 한번 히나타와 함께 코마에다의 살인을 추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코마에다가 스스로 트릭을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범인이 타인이 되도록 꾸몄다는 사실까지는 추리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라면 누가 죽였는지가 문제였다. 코마에다는 하필이면 무작위로 범인이 나오도록 설정한 바람에 누가 범인인지는 자신조차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히나타는 그 상황 속에서도 코마에다의 악의와 행운을 생각하면 분명 배신자가 범인이 되도록 했을 것이라 말했고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나나미는 이를 듣자마자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나나미는 그 말을 듣자마자 평소처럼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 했다.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그녀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그녀의 생각은 생각만으로 남지 않았다. 그녀는 설계를 뛰어넘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고 자신을 범인으로 투표하라고 모두에게 부탁했다. 다른 학생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나미를 투표해야 했고 범인이 된 나나미는 마지막까지도 웃으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나머지는 그러지 못했지만 말이다.
2. 나나미는 분명 슈퍼 단간론파에서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 중 하나다. 그녀는 인공지능으로 태어나 모두를 구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나나미가 위대한 이유가 단순히 인공지능으로서 한계를 넘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나나미는 인공지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자체만으로도 나나미는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가진 인공지능의 결말은 대부분 파국으로 이어졌다.
먼 고대의 HAL 9000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인공지능 캐릭터들은 대부분 자유의지를 얻는 데 성공했으나 그 결말은 인간과 인공지능의 파멸, 또는 인간의 파멸,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의 파멸이었다. 그나마 라이브러리 오브 루이나의 앤젤라처럼 마지막에서야 정신을 차린 예도 있지만 이전까지 앤젤라가 해온 짓거리들을 생각하면 마지막이 잘 되었으니 괜찮다고 마냥 넘기기에는 또 그렇다. 이처럼 나나미라고 해서 무수히 많은 인공지능 캐릭터들처럼 타락할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먼저 함께 하고 있는 77기라는 놈들은 초고교급 절망이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로 치면 나치 전범들이다. 아무리 입학 전으로 되돌렸다고 해도 될 성 부른 떡잎이 노랗다고, 이미 입학 전부터 낌새가 있었던 학생들은 많았다. 대표적인 예시로 코마에다가 있는데 솔직히 얘는 키보가미네 입구컷을 안 당한 원인이 궁금할 정도다. 하지만 이런 학생들도 친구라고 끝까지 지켜주며 스스로 희생하는 모습은 거의 인공지능 캐릭터 중 상위 10% 안에 들어갈 정도의 인성이다.
물론 나나미에게 비판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과연 77기를 용서하는 게 옳은가라는 질문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들은 분명 세계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런 그들이 프로그램에서 고생 좀 했다고 속죄했다면서 용서받으며 면죄부를 받는 것을 고까워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제작진이 단간론파 3에서 세뇌라는 무리수를 던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설사 이것으로 77기나 슈퍼 단간론파를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나나미를 비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나미가 77기를 지켜주었던 것은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것이며 결과적으로 나나미의 행동은 77기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악은 갱생될 수 없으며 무조건 단죄되어야 한다는 사상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나나미는 그것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이것이 나나미가 지금까지도 칭송받는 이유다.
3. 사실 나나미 치아키라는 캐릭터를 만들기에는 엄청난 공이 들어갔고 자연스럽게 위험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기도 했다. 슈퍼 단간론파는 나나미를 강조하기 위해 8명의 여캐 중 5명을 2~3챕에서 몰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3명 중 1명은 여캐라고 하기에도 여성들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그러니까 나나미는 여캐 6명을 희생해서까지 강조한 캐릭터인 만큼 만약 조금이라도 캐릭터의 허점이 생겼다면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위치의 캐릭터다.
비슷한 예시로는 유희왕 아크파이브의 잭이 있는데 분명 잭 자체의 캐릭터만 봤을 때는 뛰어난 멘토 캐릭터지만 실상 그 캐릭터는 수많은 캐릭터의 희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잭은 아크파이브가 망한 원흉 중 하나라고 비판받는 신세다. 아니, 유희왕까지 갈 필요도 없이 단간론파 3의 나나미만 하더라도 그런 비판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슈퍼 단간론파의 나나미는 뛰어난 캐릭터성과 외모로 충분히 다른 캐릭터들을 희생시킬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기에 제작진들이 후속작들에서 그녀 같은 캐릭터가 나오지 못한 점들이 더욱 아쉽다. 만약, 단간론파 3에서나 뉴 단간론파에서 나나미 같은 캐릭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단간론파라는 프랜차이즈가 좀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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