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타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 2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혹시 마레 노스트룸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로마인들이 지중해를 부를 때 쓴 단어로 '우리의 바다'라는 뜻을 가졌다. 그 정도로 로마 제국은 위대했다. 유럽에는 지금도 로마 시대 때 놓인 도로를 쓰는 곳이며 유럽의 법, 문화 등 모든 곳에 로마의 흔적이 묻어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최후는 초라하고 비참했다. 서로마 제국은 한낱 게르만족에게 속수무책으로 멸망했으며 동로마 제국도 전성기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이교도에게 몰락했다. 이처럼 로마 제국의 전성기는 위대했지만 그 결말은 그리 위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빌런도 마찬가지다.
2. 현실의 로마 제국이 있었다면 전성기에는 프로토스 제국이 있었다. 지금의 코프룰루 구역은 물론이고 우리 은하까지 새력을 확장했던 프로토스 제국은 당대, 그리고 역사상 최강의 제국이었다. 댈람은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엄청난 함대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으며 훨씬 더 정교하고 강력한 화력의 함선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프로토스 제국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 바로 대의회였다.
프로토스 제국은 이름과 달리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었다. 그 대신, 대의회라는 고위 심판관들이 모인 국가 기구에서 모든 의사결정을 수행했다. 심판관은 당시 프로트스의 세 계급 중 가장 높은 계급으로 주로 학자나 정치가로 구성된 계급이었다.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숙한 중재자(아비터)가 심판관들이 운용하는 함선 중 하나다. 이 심판관들이 모여 만들어진 대의회는 프로토스 제국을 이끄는 중심이었다.
대의회는 프로토스 제국의 전성기를 충실히 이끌었다. 그들은 프로토스 제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정과 조화를 추구했다.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프로토스의 몰락을 대비해 아둔의 창 등 3기의 대함선을 건조한 일인데 훗날 아둔의 창이 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이를 대의회의 업적으로 돌리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다만, 전성기의 대의회가 실수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대의회는 기계에 프로토스 전사의 의식을 이식하는 정화자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식은 성공적으로 되었으나 대의회는 이들을 같은 프로토스 전사가 아닌 한낱 기계로만 보았고 정화자들은 이에 반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정화자들은 사이브로스에 봉인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만약 아이어 침공 당시 정화자들이 프로토스의 주역으로 활약했다면 프로토스가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크나큰 실책이었다.
이런 실책 때문이었을까? 그 막강한 프로토스 제국도 점점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쇠퇴한 국력조차도 쉽게 무너질 정도는 아니였다. 그렇기에 이상하게 생긴 벌레들의 침공은 너무나도 쉽게 막을 수 있을 거리라 착각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단순한 소모전 양상으로 가기엔 저그들은 너무 강력하였고 프로토스는 초월체의 아이어 강림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회는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대의회는 그들의 대변인 알다리스에게 저그를 막고 배반자로 추정되는 태사다르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태사다르는 나름대로 정신체를 제거하면 저그의 공세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나 정신체를 죽이는 것은 암흑 기사들 없으니 불가능했다. 결국 태사다르는 암흑 기사들과 손을 잡고 대의회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 태사다르를 체포하기 위한 내전을 시작한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대의회는 저그의 공세를 어느정도 늦추는 데 성공하자 그 병력을 저그가 아니라 태사다르에 돌리는 선택을 하였고 그 결과는 아이어의 완전한 함락이었다. 태사다르도 내전이 길어지면 발생하는 일을 알았기 때문에 스스로 대의회에 항복하는 선택을 하였다. 그러나 제라툴, 피닉스, 아르타니스와 레이너는 태사다르를 구출한 뒤, 대의회와 알다리스에게 정신체를 죽이는 모습을 보여주며 태사다르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대의회와 알다리스는 그제서야 태사다르를 인정, 저그의 공세를 막는 것을 도우며 초월체 제거에 기여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아이어는 이미 쑥대밭이 된 지 오래였다. 대의회는 더 이상 아이어 탈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헛된 저항을 하다 전멸하고 만다. 이것이 프로토스 제국을 이끌었던 대의회의 허망한 최후였다.
3. 전체적인 평가를 하기 전에 먼저 설정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게임에서는 대의회가 저그에게 전멸하였다고 언급된다. 반면, 블리자드의 공식 인증을 받은 소설에서는 태사다르가 대의회를 제거하였다고 언급된다. 하지만 이 설정은 게임 상의 설정과 너무 모순된 점이 많다는 점에서 전자의 설정을 사실로 간주하고 글을 썼음을 알린다.
일단 대의회가 프로토스 제국의 전성기를 훌륭하게 이끌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프로토스 제국의 전성기는 다시 말하겠지만 위대했으며 전성기의 유산인 아둔의 창, 정화자, 거신, 모선 등이 없었다면 아몬과의 싸움에서 댈람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는 동안 대의회는 변하지 않았고 과거에 통했던 방식은 현재에 통하지 않았다. 저그라는 기존의 프로토스와는 다른 종족과 싸울 때, 대의회는 똑같은 방법만을 일관적으로 대응했고 태사다르가 저그보다 더 위험하다는 실수를 했다. 결국 이것은 아이어가 저그에게 함락당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거기에 대의회는 아이어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모한 항전을 벌였고 그 결과는 대의회의 몰살이었다. 그리고 그 항전은 전형적인 프로토스다운 최후였다. 프로토스의 가장 큰 결점은 적당히라는 것으로 모르고 무리해서 싸우다가 결국 전멸을 택하는 것인데 대의회도 똑같은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 관계로 대의회는 전성기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빌런으로 남게 되었다. 만약 대의회가 시대의 흐름을 보고 조금 더 유연한 대처를 하였다면 프로토스 제국은 지금도 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적으로 거시적 평가를 하자면, 대의회는 전형적인 프로토스 내 보수층을 상징하며 이는 태사다르 등 혁신파들과 대조되며 태사다를 빛내는 좋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의회는 다른 빌런들과 다르게 대의회에 소속된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성 부족이라는 아쉬운 모습을 보인다. 다만, 캠페인의 분량이 한정되었다는 점, 그리고 오리지널에서는 알다리스가 사실상 대의회를 대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은 어느 정도 참작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4. 그렇다면 그 대의회의 충실한 대변인이었던 알다리스는 어떨까? 알다리스는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대의회의 소속되지 않았다. 그는 심판관이기는 하지만 대의회를 대변할 뿐, 대의회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다리스는 비록 대의회와 비슷한 성향을 보이지만 그보다는 살짝 덜 보수적 성향을 가진다.
대의회와 알다리스의 행보가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브루드워부터인데, 대의회는 의미없는 항전을 하다 전멸당하지만 알다리스는 비록 아르타니스나 제라툴보다는 고민하더라도 전략적 후퇴를 선택한다. 여기서부터 알다리스가 대의회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알다리스는 네라짐의 수도성인 샤쿠라스로 후퇴, 거기서 네라짐과의 협력을 꾀한다. 그러나 네라짐의 수장, 라자갈은 칼날 여왕과 동맹을 선택하며 이에 반발한 알다리스는 회의장을 떠나 독자 노선을 타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다리스가 복귀하는 것은 프로토스 캠페인 후반인데, 그는 칼라이 난민들로 구성된 반란군의 수장이 되어 네라짐과 아르타니스파 칼라이가 연합한 네라짐 - 칼라이 연합을 공격한다. 알다리스는 심판관 내에서도 인망이 높은 편이었기에 많은 칼라이들은 알다리스를 따랐고 따라서 내전은 매우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봉인된 존재였던 암흑 집정관까지 꺼내 겨우 내전에서 승리한 네라짐 - 칼라이 연합은 알다리스의 항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알다리스는 아르타니스와 네라짐을 비난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난입한 칼날 여왕에게 살해당한다. 이것이 알다리스의 최후였다.
5. 기본적으로 알다리스가 아이어 침공 당시의 대의회보다는 나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전략적 후퇴를 생각할 수 있었으며 대의회의 대변자로 행동할 때도 태사다르를 믿었다고 말하거나 아르타니스를 희망이라고 말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도 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빌런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삶에서 가장 논쟁거리가 되는 내전이었다.
모든 진실을 안 시점에서 알다리스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라자갈은 실제로 칼날 여왕에게 세뇌당하고 있었고 알다리스는 이를 알았기 때문에 라자갈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리고 얼핏 보면 그의 내전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일단 알다리스는 진실을 알았다. 칼날 여왕이 라자갈을 조종한다는 것은 곧 네라짐을 사실상 손에 넣었다는 것이었고 이는 프로토스 전체에 큰 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칼날 여왕에게 조종당하는 라자갈을 제거하고 자신이 프로토스의 통제권을 얻어 또는 프로토스의 통제권을 프로토스에게 돌리는 일은 어쩌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꼭 반란과 내전만은 아니었다. 먼저 프로토스는 칼라라는 모든 칼라이를 하나로 잇는 정신체계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칼라이, 특히 칼라이와 네라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던 아르타니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만약 성급한 반란이 아니라 아르타니스를 통한 중재를 시도했다면 반란 없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거기에 프로토스의 병력은 아이어 침공으로 인해 약해졌고 그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킨 덕에 프로토스는 추가적인 병력 손실로 고생하게 된다. 이는 텔레마트로스 함락이나 오메가 대전의 패배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마지막으로 알다리스가 반란을 일으킨 동기가 단순히 라자갈이 위험해서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알다리스는 끝내 네라짐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했고 이는 마지막에 제라툴과 네라짐을 어두운 존재로 칭한 것에서 들어난다. 알다리스는 비록 일시적으로 네라짐과 손을 잡았을지언정 근본적인 혐오를 버리지는 못했다. 알다리스는 언젠가는 네라짐을 제거하거나 최소 무력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결국 알다리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이는 프로토스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 병력 손실은 물론이요 잃어버린 칼라이와 네라짐의 신뢰가 결정적이었다. 훗날 댈람의 신관이 되는 아르타니스는 붕괴된 신뢰를 회복하려 노력하지만 이는 아몬이 전면으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실패로 그치고 말았다. 실제로 스타크래프트 2를 보면 군단의 심장까지 프로토스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 않는데 이는 내부사정이 녹록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결국 알다리스는 남들이 알지 못한 진실을 안 선지자였으나 동시에 마음 속에 남은 혐오를 버리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한 보수주의자였으며 이 두 가지의 결합은 결국 알다리스를 배신자로 남게 했다. 만약 알다리스가 조금만 더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더 탁월한 선택지를 고르는 데 성공했으면 프로토스의 미래가 조금 더 밝은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지막으로 거시적 평가를 하자면 알다리스는 이처럼 프로토스 캠페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빌런이었고 그는 성공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블리자드는 그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는지 훗날 스타 2나 다른 매체에서의 그의 대우는 실망스러웠다. 이미 늦은 말이지만 알다리스는 조금 더 대우받아야 할 빌런이라 생각한다. 그는 몇 안 되는 심판관의 네임드이자 칼라이의 매력적인 빌런이다. 앞으로 스타크래프트 시리즈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블리자드가 알다리스를 재조명하는 날이 오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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